윤석남 (학고재갤러리) 보고

윤석남 전이 학고재에서 열린다고 했다. 일정이 빡빡한 수요일, 중간에 3시간 정도 비는 틈을 타 학고재 갤러리로 갔다. 엇! 본관은 전시준비 중이었다. 알고보니 윤석남전은 별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1층에는 붓으로 그린 일러스트 같은 작가의 자화상이 여러점 걸려 있다. 그 그림들을 보며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이번 전시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그림이 나온다. 
이 그림은 한국 전통 민화인 책가도를 배경으로 작가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그림도 나름대로 좋다. 위쪽 책가도의 책은 한국 고서적들이고, 
아래쪽의 책은 작가가 보고 있는 현대의 책이다. 미술관련 책도 있고, 가지런하지도 않다.
그 옆에 나란히 걸린 이 그림이 나는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자화상 뒤쪽 배경 작품들이 전부 윤석남 작가의 작품들이다.
나도 알고 있는 작품들이다. 작가의 작품을 작가의 자화상에서 발견하는 기쁨!
게다가 이 그림에는 작가의 투박한 손이 나오는데, 옹이진 손도 좋다.
물론 붉은 벽돌색과 푸른 레깅스, 앞치마의 색 조합도 내가 좋아하는 색이고.
한동안 서서 저 나무판의 여인도와 화가의 손을 물끄러미 봤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면 이런 작품이 있다.
'우리는 모계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엄마, 외할머니 등 모계 여자들이 나무판에 그려져 있다.
아래쪽 붉은 물결과 뒤에 걸린 청록색 커튼의 색조합도 좋고, 
작가의 전매특허 같은 나무판의 그림들도 좋다.
이 작품에는 2:2로 서로 닮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위의 작품 입구에는 이렇게 나란히 '우리는 모계가족'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작은 그림이 걸려 있다.
인물 구성은 똑같은데, 몇분의 한복이 달라져 있다. 이 그림과 위의 나무판 그림이 똑같은가 봤는데, 
얼굴 모양이 약간 다르다.
그리고 가장 지하, 이번 작품전의 메인 무대로 내려가면 '핑크룸'을 보기 전 
맛보기로 이렇게 작은 그림이 걸려 있다. 역시 자화상이다.
주황색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핑크룸의 의자 위에 앉아있는 여자 그림과 비슷하다.
핑크룸 전경!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들어갈 때 구슬 위에 서면 사고날 수 있으니까 절대 구슬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되어 있다.
바닥에 깔린 저 분홍색이 바로 구슬들이다.
가까이 가보면 바닥의 구슬들도 선명하게 보이고, 
분홍색 비단 치마를 입은 나무판에 그려진 여진과 화려한 공주풍 의자.
의자의 다리를 보라! 역시 날카롭고 위태롭다. 윤석남의 작품인 것이다.
여인의 까만 옷은 자개로 장식했다. 
나무판의 그림과 자개와 비단 치마.
그리고 의자 다리의 날카로움. 하이힐 같기도, 송곳 같기도 한.
벽의 무늬들은 습자지(혹은 한지)를 하나하나 잘라 만든 작품들이다.
세계 각국의 여자 얼굴이라고 할까?
핑크를 강요하는 유년시절의 기억에 맞서는 저항의 목소리라고 하는데, 
1996년에도 핑크룸의 첫번째 버전이 있었고, 그때 사용했던 의자를 다시 꺼내어 만든 거라고 한다.
다 보고 나오니 학고재 옆마당에 이런 불상이 서 있었다.
어쩐지 윤석남 작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남
학고재 갤러리 별관
2018. 9. 4~10. 14
무료


너랑 나랑 노랑 읽고

너랑 나랑 노랑 
오은 | 난다

이 책은 독서모임만 아니었다면 앞의 10페이지쯤 읽고 덮었을 것이다. 꾸역꾸역 끝까지 읽는데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했고, 끝까지 재미없었다.
나는 처음에 이 책 한다고 했을 때 지은이 이름을 '조은'으로 잘못 들었다. 조은의 글은 좋으니까 그 사람이 색채에 대해 말한다면 재밌겠구나 했다. 책을 빌려서 보니 '오은'이었다. 시인이라는데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 책을 읽어보니 그의 시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그림을 색깔별로 나누어 놓은 미술에세이인데, 내가 대체 왜 이걸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을 거의 매 페이지마다 했다. 나름 자료조사도 하고 화가나 그림을 그릴 때의 사연 같은 것들을 녹여내어 그림 하나당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놨는데,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종이낭비 같았다. 그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자체가 기발하거나 재밌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장이 좋으냐 하면 쓰잘데없는 군더더기로 가득차 있다. 나는 시인이란 글과 단어 하나하나를 정련해서 쓰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 글을 보면 시인이 뭐가 이런가 싶다.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글이 '파란색 크레파스로 사랑해'라는 호안 미로의 작품에 대한 시였는데, 그것도 너무 길어서 아래에 베끼다가 관뒀다.
다 읽고 나면 후기에 허수경, 정우열, 김혜리 기자의 추천사가 있다. 추천사들이 너무 좋아서 딴 책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정우열(올드독)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알랭 드 보통의 시각에서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했지만, 나는 다른 책 봐도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김혜리 기자는 기사, 일기, 희곡 등의 다양한 장르로 글을 썼지만 모든 장이 시집처럼 읽힌다고 했다. 그게 칭찬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2주 동안 포기하지 않고 읽은 나를 셀프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밑줄긋기
16 _ 레드는 가장 빛나는 한때고 누구에게나 있는 왕년입니다. 
93 _ "단어들로부터 시가 시작되듯 붓놀림으로부터 그림이 완성된다"는 게 미로의 지론이었다. 그는 "의미는 나중에 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55 _ 색채는 그림의 본질이지만, 주제에 의해 항상 살해되어왔다. (말레비치)
165 _ 모든 그림은 예술가가 사랑에 빠진 지점을 보여준다. (시슬리)
326 _ 종일 컴퍼스와 자를 가지고 놀았다. 놀았다는 말을 하니 주위 사람들이 농을 던진다. 그들은 지나친 엄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놀았다는 것은 내가 이 작업을 그만큼 즐겼다는 것인데,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은 내 프로 의식을 의심한다.



파란색 크레파스로, 사랑해

9월 폰털이 일기 살고

독서모임에서 <사피엔스>를 읽었다. 세계관이 흔들리는 좋은 책이었다.
발제자가 요즘 잼라이브에 꽂혀 있어, 퀴즈대회를 잼라이브처럼 하겠다고 하더니, 색지에 1, 2, 3과 하트를 그려서 나눠줬다. 각 문제에 대해 번호를 들고, 전체 중 하트로 한번 부활할 기회를 준 것. 그러나 저러나 모든 회원들이 중도 탈락했다. ㅋㅋㅋ 어려워서 문제를 풀 수가 없어. 중간에 다 같이 패자부활을 해서 결국 회장님이 1등을 잡수심.
잼라이브를 오프라인에서 어떻게 하나 했더니, 이런 방법이 있었다.
독서모임 마치고 갔던 한 카페에서 자이언트 종이꽃으로 벽면 장식한 걸 봤다. 바로 몇주 전에 자유시민대학에서 자이언트 종이꽃 만들기를 손수 해본 뒤라, 보는 순간 알았다. "엇! 저거 자이언트 종이꽃이야!" 심지어 내가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의 꽃들. 아마 내가 만들어보지 않았다면 "이 가게 인테리어 아기자기하네" 하고 말았을 터. 역시 사람은 아는만큼 보이는구나 싶었고, 꽃을 만들 때는 '이걸 엇따 써?' 싶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장식된 거 보니 예쁘드아~ ㅎㅎㅎ

광흥창 이사온 후 처음으로 서강대교를 걸어서 건넌 날이다. 이사 이후 내내 날이 더워서 걸어가는 건 엄두도 못냈는데, 9월 들어 드디어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 그 전날, 아침에 걸어갈까 하다가 아침부터 기운빼면 도서관 가서 잘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올 때 걷자 했는데 폭우가 쏟아져서 못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렇게 하늘에 구름이 마술을 부리던 날, 걸었다. 의외로 광흥창은 국회와도 멀지 않고, 신촌과도 멀지 않아 만보계를 보면 4천보 정도? 오히려 합정에서 걸어오면 6천보가 넘는다. 
앞으로 걸을 날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스크 끼고 부지런히 걸어다녀야겠다.
용리단길 모나미 카레에 또 한번 갔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1시 45분쯤.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2층으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2인용 좌석 아무데나 앉으라는 거다. 그래서 손님이 있는 테이블과 떨어져 앉았더니 거긴 3인석이라는 거다. 사진에 나오는 바로 저 좌석이다. 2인석과 똑같은 좁은 테이블에 의자만 3개 놓여 있었을뿐. 알고보니 2인석은 그 넓은 매장에서 유일하게 손님 한팀 있던 옆 자리 밖에 없었다. 헐....그럴 거면 자유롭게 앉으라는 소리는 왜 하나? 그냥 여기 앉으라고 지정을 해주지.
저 넓은 좌석들 다 놔두고 딸랑 두 팀 있는 손님을 바로 옆자리로 착석시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그때 시간이 12시였다면 나도 이해했을 것이다. 손님이 많은 가게니까 2인이 4인 좌석에 앉으면 손해가 크겠지. 그러나 그때 시간 2시 15분 전이었고, 이후로 이 매장에 손님은 아무도 안왔다. 알바들이 유도리가 없는 건지, 꼭 매뉴얼대로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분 나빴고, 다시는 이 가게 안가기로 했다. 손님은 인간인데, 어쩜 이렇게 로봇 같은 응대가 있는지.
일요일 오전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그 며칠 전부터 도로에 차량통제 안내문이 붙었다. 9시반까지 차량통제를 한다니 나는 10시쯤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서관 같이 가는 언니가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해서 데리러 오겠다 했고, 나는 차량통제하니까 오지 말라고 말리면서 평소보다 더 일찍 준비가 끝났고, 때마침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잦아들길래 계획했던 것보다 행사가 일찍 끝났을 수도 있겠다 싶어 가방을 매고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후발주자들은 뛰고 있었다. 그때 잠시 갈등했다. 나도 이 주자들 틈에 섞여서 그냥 서강대교를 걸어서 건널까? 햇볕만 따갑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이 넘나 따가웠고, 더웠다. 그래서 서강대교 쪽으로 가지 못하는 버스를 탔다. 그게 문제였다. 그 버스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신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버스 기사가 마포대교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자 안내려준다고 버스 안에서 거의 폭동이 일어났다. 남의 말 안듣는 장로님 느낌의 남자 하나가 노발대발했고, 그때까지 참고 있던 모든 신도들이 왜 마라톤을 일요일에 하냐부터 누구 허락받고 서울시는 이딴 짓을 하냐까지...아...듣고 있는데도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저렇게 이기적으로 굴면서, 자기는 피해 한톨도 안입으려고 하면서, 교회 가서는 용서를 구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 하겠지? 딱 정나미가 떨어졌다. 너무 열뻗쳐서 나도 한 마디 했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걷고, 기다려서 국회도서관에 도착하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ㅠ.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서강대교 걸어서 건널 걸. 아니 그냥 9시반에 나와서 교통통제 풀렸을 때 버스 탈 걸. 전자든 후자든 버스 2번 갈아타고, 교회 신도들 폭주하는 속에서 영혼 탈탈 털리는 것보다는 시간은 반도 안 걸리고, 훨씬 스트레스 덜 받았을 것이다.
남친이 이번에 나온 플랜비 3호를 납품하러 연남동 헬로인디스북스 간 날, 따라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정기휴일이었다. 왜 전화 확인을 안하고 무턱대고 책을 가져왔냐고 잔소리했다. 그 다음 날에 또 다시 갔다는데, 이번에는 무슨 행사에 간다고 이틀동안 문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한다. 아니..한번 실수했으면 됐지, 두번째 갈 때는 왜 전화를 안한 것인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도 전화하는 거 별로 안좋아하지만, 이렇게 전화하기 싫어해서야...영업했으면 딱 망했을 팔자. -.- 다행히 옆집 사슴책방에 책을 맡겨두고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사슴책방은 그림책만 파는 책방이란다.
요즘 독립책방에 대한 대본을 쓰고 있어 이런 일들 하나하나가 다 관심이 간다.
모두의 책방 오픈식에 가서 할아버지들의 자작곡 연주를 들었다. 
70~80대의 할아버지들이 젬베 등의 악기를 배워 합주를 하고,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써서 노래도 만들었다. 연주 시작하기 전에 할아버지 두 분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어딘가로 가버렸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추겠다고 준비를 해왔는데, 한복 든 가방이 없어졌다는 거다. 한참을 두리번대다 엉뚱한 곳에서 까만색 캐리어를 찾았고, 그 안에서 갓, 한복, 부채가 끊임없이 나왔다. 연주 해야 하는데, 그 할아버지는 그 옷을 다 입고 춤을 추겠단다. 지도하시는 인디가수가 할아버지 옷 갈아입을 동안 즉흥곡을 연주하고 노래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메꿔주었다. (할아버지 지도도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한복을 입고,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노래 제목은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바라는 건 자손들에게 폐안끼치고 잘 살다 정갈하게 가는 것, 혹시 잘못한 게 있으면 빌고 용서받고 가는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였는데, 듣다가 울컥했다. 저 나이대 한국 남자들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처음이다.
아...진심에서 나오는 솔직한 말은 사람을 이렇게 울리는구나 싶었다. 
노래가 끝나고 사회자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빵터졌다. 그렇지, 말은 저렇게 해도 실제로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너무 잘 아는 사회자였다. ㅋㅋ
하늘이 파랬다면 더 좋았을테지만, 날이 흐려도 노란 파라솔은 화사하다.
이 파라솔 아래 직원들과 둘러 앉아, 나는 직원도 아니면서 그들 이야기를 듣고 웃고 한 마디 보태며 점심을 먹다가, 일개 외주 알바 주제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슬그머니 일어나 나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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