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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쓴 글] 신문의 종말과 그 이후 (장강명/한국일보) 생각하고

*여러 면에서 나의 생각과 비슷하며 내가 의문을 품고 있는 문제의 의문을 던지는 글. 
답이 없다는 게 답답하지만서도 질문만으로 의미 있음. 
(원문: http://www.hankookilbo.com/v/8332eb7a9538488da8660923e5e75328 )


신문의 종말과 그 이후 


한국일보에 글을 쓰게 된 뒤로 아무래도 이곳 칼럼들을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한국일보 칼럼들은 고르게 수준이 높다. 영광으로 여긴다. 11일자 지평선 코너에는 “‘이니 팬덤’의 레드 라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날카롭지만 점잖은 필치다. 내용은 상식적이다. 칼럼의 필자도, 한국일보도 특정 정치세력 편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한국일보 기사들이지만 아마 인터넷 한국일보 사이트보다는 포털 뉴스사이트를 통해 읽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게다. 14일 현재 네이버뉴스에서 위의 지평선 칼럼을 찾으면 400여 개의 댓글을 함께 볼 수 있다. 가장 호감이 높은 댓글은 ‘기레기들 니네 레드라인은 이미 넘었다 ㅋㅋ 맨날 거짓기사 날조하는 주제에 ㅋㅋ’다. 두 번째는 ‘어쩌라고 기레기 새끼들아. 니네 폐간할 때까지 후드려 패겠다’다. 세 번째는 ‘너네 폐간이나 걱정해라 븅들’이다.
한국 언론은 그 동안 특권과 특혜를 누렸다. 팬덤 정치는 우려스럽다. 
그러나 이쯤 되면 그런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그냥 맥이 빠진다. ‘아, 신문은 이제 정말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끝나겠구나, 끝나는구나’가 아니라 ‘끝났구나’다. 신문사라는 회사나 기자라는 직군 이야기가 아니다. 신문이라는 매체 이야기다. 몇몇 신문사는 디지털 혁신과 사업다각화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떤 음반사들이 연예기획사로 변신했듯이. 기자라는 직업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수들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뉴스산업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것이고, 그 종사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신문은, 내 생각에는 레코드판 신세다. 지금의 저널리즘은 모습이 크게 변할 것이고 어떤 가치는 증발할 것이다. ‘한 앨범의 곡을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다’는 음악감상 문화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가치가 사라질까? 다시 말해, 신문은 무엇인가? 신문은 특종이 아니고, 통찰력 있는 칼럼도 아니다. 속보는 더더구나 아니다. 특종과 좋은 칼럼, 신속한 보도는 신문 이후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권위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오늘의 1면 톱기사고, 이 소식은 사회면 하단쯤에 실리면 되고, 이 뉴스는 일반 독자들이 알 필요가 없다’고 분류하던. ‘당신이 읽기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생각에는 중요한 기사니까 읽으라’고 강요하던. ‘이 얘기를 한번 해보자, 이런 점을 살펴보자’고 소리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들어야만 했던. 
그 권위는 기득권 남성 중심적이라 소수자의 형편을 살피지 않았고, 자신들이 주장하던 바와 달리 전문성도 높지 않았다. ‘그들만의 이익’에 봉사한 경우도 흔했다. 업계, 회사, 개인 차원에서 모두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구심력이기도 했다. 그 권위를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다. 젊고 순수한 기자들이 아무리 열정을 불살라도 불가능하다. 독자에게는 ‘1면 톱기사’가 아니라 그의 관심사와 취향을 파악한 알고리즘이 보내준 맞춤형 기사, 댓글 많은 기사, 친구가 공유한 기사가 전달될 테니까. 내가 보기에 한국 신문사들은 이미 그런 원자재를 포털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급하는 통신사 신세다. 공들여 특종이나 기획기사를 써봤자 신문의 브랜드와 분리되어 소비된다. 1면 톱기사보다 실시간 검색어의 영향력이 더 크다. 사설을 읽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것은 신문 이후의 세상이다. 뉴미디어는 어떤 사안을 고발하고 확산하는 데에는 뛰어나지만 사회통합의 기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기존 개념으로는 정의조차 내리기 어려운 새 매체들에 책임을 지우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파편화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알기 쉽고 자극적인 사건들이 복잡한 의제를 대체한다. 선명하고 이상적인 구호들이 논의와 협상을 대신한다. 그래야 겨우 여러 게토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도, 샌더스 현상도, 이것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인 현상이다.
매체환경의 변화를 어찌할 수 없다면 새로운 종류의 미디어 문해력(文解力)을 보급하는 게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함께 보라”는 식의 조언이 통하지 않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양 극단에 있는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두 개를 받아보면 중도의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뉴스피드가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주장들로 뒤덮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문해력이 어떤 형태일지조차 잘 모르겠다. 어찌어찌 모습을 대강 그린다 해도 그렇게 어렵고 힘든, 게다가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할 ‘생각의 기술’이 쉽게 퍼질 것 같지 않다. 매스미디어 이후의 사회가 매스미디어 이전 사회보다 얼마나 나을지 지금 나로서는 감이 안 잡힌다. 공통의 목표나 지향 없이 이슈와 논란 위를 떠다니기만 하는 ‘초부유(超浮遊)사회’ 같은 것이 오지 않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든다. 어제와 그제 포털 뉴스사이트와 SNS는 어느 시내버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느냐는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다.

장강명 소설가

타이포잔치2017 - 몸 (문화역서울284)

서울역까지 나간 김에 문화역서울284에도 들렀다. 몇 년 전에 여기서 타이포 전시할 때 한번 갔었는데, 이번에도 타이포 전시를 하고 있었다. 벌써 5회나 되었다고 한다. '제 5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이고, 2017년의 테마는 '몸'인가보다. 함께 간 다른 멤버들은 서울역사가 이런 식으로 바뀌고는 처음 와본다고 한다. 
처음에 시큰둥하게 따라갔던 나는,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흥분, 나중에는 2층에서 이거저거 타고, 만져보고 혼자 신났다고 한다....^^;;;
메인 입구가 아닌 곳부터 붙어있는 타이포잔치 현수막
메인 현수막. 
몇년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타이포그래피 전시인데, 어째 글자를 읽기가 힘든지...
글자의 가독성을 생각하는 내가 뒤떨어진 건가...
미술로 보는 타이포는 원래 가독성 따위 개나 주는 건가...
언제나 멋진 문화역서울의 메인 로비. 
저기만 보면 꼭 오르세 미술관 같단 말이지!
  
그리고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1930년대 느낌의 창문과 단아한 샹들리에
여긴 오래된 역사 보는 맛이 있어 좋다.
 
처음 설렁설렁 대충 보고 다닐 때 봤던 타이포 관련 병풍.
우리나라 작품들이었고, 한자문화권 문자도라고 해서 눈에 띄어 찍어봤다.
돌잔치 때 쌓는 사탕에다 '축'자를 새긴 게 민화 같기도 하고 특이하다.
재밌게 봤던 '최악의 하루' 포스터는 캘리그래피 때문에 전시된 듯.
전시관을 나와 1층 뒤쪽 복도로 가면 거기에도 전시가 연결된다. 
아이들이나 관람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작품들이다.
이건 선풍기 바람에 궤도 같은 종이들이 펄럭거리는 것이 재밌어서 찍어봤다.
2층으로 올라가는데, 이번 전시회 로고인 몸 형태의 텍스트가 바닥에 붙어있다.
느무느무 멋진 2층 샹들리에. 느낌은 이불의 작품 같은데, 
내 기억으론 이거 초반 전시회의 작품을 그대로 계속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런 것도 멋짐! 
2층에서 넘 재밌게 놀았던 목마. 아무도 앉지 않는데, 내가 떡하니 앉아 흔들거리며 부저를 눌렀더니, 
음악이 나오면서 그 음악에 맞춰 저 인형들이 다리를 까딱거리며 책을 읽는다. ㅎㅎㅎ
이렇게 노는 물건임. (모델 협찬 : 전 동거인들)
 
목마 옆의 방으로 들어가면 내 얼굴과 몸짓이 작품에 반영되는  재밌는 동영상이 나온다.
마치 만화처럼 대사가 나오기도 하고, 내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저 파란 뭉치들이 막 움직임.
전부 사방벽 스크린에 비치는 동영상 작품이다.
이건 생물문자던가? 여튼 개념이 재밌는 문자였는데, 
저 기어가는 아기 같은 것이 어떻게 보면 에이리언 같고 어떻게 보면 태아 같고,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한 것 같기도 하고 묘하다.
이 형상들의 몸짓에 따라 알파벳처럼 문자가 된다. 
다른 개념적인 작품보다 이해하기도 쉽고, 그럴듯도 해서 찍어봤다.
원통형 안에 한글 텍스트가 레이저처럼 벌겋게 보이는 작품.
그리고 복도 끝 방에 들어갔더니, 관람객이 직접 키보드를 치면 글자가 스크린에 새겨지는 작품이 있었다.
온갖 것들을 혼자 신나서 치다가 (저 글도 내가 친 글씨임) 결국 1층에 가서 친구들을 불러왔다.
친구들한테 목마를 태우고, 동영상 방에 들어가 움직여보라 하고, 이 방에도 끌고 왔다.
하수진 바보라고 썼더니 그런 유치한 것 밖에 못쓰냐고 타박하던 언니는, 
결국 자리에 앉아 이유정 바보를 치더라. -.-;;
내가 2층에서 노는 동안 1층의 다른 전시실을 구경한 친구들을 따라 다시 1층으로 갔다.
침대 이불 위에 '소근소근소근 이러면 잠이 솔솔 오겠죠'라고 적혀있다. 그럴 듯해...
2층의 원통형 작품과 자매품이 아닌가 싶은, 빨간 네온사인
그리고 19세 관람불가였던 방의 동영상 병풍 작품 
왼쪽은 1900년대 일본 작품이라고. 종이의 재질에 대해 한참 설명되어 있었다.

이렇게 다 본 줄 알았는데, 나가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커피숍 옆에 또 뭔가가 있었다.
알고보니 별관이었다. 여기도 안들어가 볼 수 없지. 들어가 봤다. 
창문에 고무풍선인지 껌인지 예술작품들이 늘어 붙어 있고, 쉴 곳도 많고 볕도 잘 들어온다.
 별관 전경.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이 프린팅 되어 있고, 그 앞에 폐자재로 만든 벤치.
그리고 종이로 문구를 만드는 회사(소소문구 등)와 제지 회사의 종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타이포는 결국 인쇄와 밀접하다보니 종이들이 중요할 수밖에.

이렇게 야무지게 전시를 보고 나왔다. 10월 29일까지 하는 무료 전시이니 서울역 근처 가시는 분은 보러 가시길!
특히 2층과 뒷복도에 체험형 작품이 많아서 재밌게 놀 수 있다. 1층 메인 로비에도 스티커 붙이기 놀이 등이 있다. 
문화역서울 나오면 이런 늠름한 동상과 이제는 서울스퀘어가 되어버린 대우빌딩이 여전히 있다.



타이포잔치2017 : 몸
-제5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2017. 9. 15~~10.29 
관람시간 : 오전 10시~저녁 7시
휴관일 : 9/18, 10/4, 10/16
문화역서울284 외 




[베껴쓴 글] 행복은 노력순이 아니잖아요 (서은국 교수 / 한겨레21) 생각하고

*한겨레21의 '김아리의 행복연구소' 코너에 서은국 교수 인터뷰가 실렸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쓴 저자라고 한다. 인터뷰 중 행복에 관한 귀담아 들을 말이 있어서 발췌하여 베껴 썼다. 

인간이 왜 질투를 느낄까? 특정한 상황에서 질투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질투를 느끼는 사람보다 생존 확률이 낮았고, 적절한 수준의 질투를 느낀 사람이 결국 유전자를 남기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그냥 있는 게 하나도 없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기능을 한다. 그럼 행복은 뭘까? 본질적으로 '감정'이다. 좋다, 즐겁다, 신난다 이런 걸 크게 묶으면 긍정적 감정이다. 

행복의 개인차는 유전이다. 내가 유전적으로 쾌활한 성격이 아닌데, 감사하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유전적이라는 말의 뜻은, 편의상 행복을 100m 달리기라고 할 때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100m를 16초에 달릴까 말까이지만, 유명한 선수들은 훈련도 안 하고 자다가 라면 먹고 달려도 12초에 뛴다. 그런 선천적 개인차가 있는데 이는 당연히 유전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조금 더 빨라질 여지는 있다. 열심히 체력훈련을 하면 2초 정도 달리기 기록을 당길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노력하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정서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자기계발서는, 너는 어떻게 생겨먹었든지 간에 감사해라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열심히 골프 연습을 하면 타이거 우즈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과장된 얘기다. 아마추어 골퍼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이거 우즈는 되기 어렵다. 그러나 타이거 우즈건 아마추어 골퍼건 한 타를 줄일 방법은 있다. 그게 행복에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거다. 선천적으로 행복도가 높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행복에서 '외향성'이 키(key)다.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고를 예측하는 변인은 5천여 개 된다. 수많은 변인 중 독보적으로 예측 결과가 잘 맞는 것은 외향성이다. 외향적 사람이라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개인차보다 외향성 점수가 높은 사람이 행복할 확률이 높다. '나는 내향적인데도 행복할 때가 있다'는 반박이 나올 수 있는데, 내향적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내향적 사람이 무지하게 행복할 때가, 외향적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때와 강도가 비슷하다. 내향적 사람도,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이랑 있을 때 더 행복해진다는 거다. 실험적으로 많은 논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행복해지려면 자유감이 있어야 한다.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직장은 꼭 삼성에 취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감이 필요하다. 개인의 행위와 일상의 습성을 지지하는 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사회에선 행복해지기 유리하다. 덴마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의 문화가 그렇다. 그런데 사사건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여기서 벗어나면 '루저'거나 '아웃'이라며 하나의 잣대로 모든 인간을 구겨 넣으려는 문화에서는 사회적 요구에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행복감을 추구해야 한다. 결국 이윤이 남지 않는 장사가 된다. 집단주의적, 수직적, 획일적 사회인 한국, 일본, 싱가포르가 경제적으로는 잘 살지만 행복하지 못한 이유다.

물질은 비타민 같은 것이다. 결핍이 있으면 안된다. 먹고 잘 데가 없는데 행복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비타민은 필요량을 채우면 더 먹는다고 이득이 없다. 이처럼 물질과 행복의 상관관계도 정비례하다 어느 선에서 멈춘다. 한국은 비타민 과잉 사회다. 찢어지도록 가난할 때는 고깃국 한번 먹으면 행복도가 확 올라가지만, 이제는 물질을 더 많이 투자한대도 행복 아웃풋이 크게 나오지 않는다. 돈이 아닌 다른 것을 투여해야 행복의 차이가 나타난다.

같은 값이면 행복한 게 좋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언제나 행복한 것은 큰 그림에서 보면 그리 건강하지 않은 호모사피엔스의 모습이다. 슬플 때 슬퍼야 하고, 화날 때 화내야 한다. 24시간 행복한 것이 이상적 모습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이점이 많은 삶도 아니다. 삶은 행복해지기 위해 디자인 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 해가 뜨는 것도 아니다. 큰 자연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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