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요]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살고

경쟁PT에 들어갔던 거래업체가 일을 따냈다며 함께 일하자고 부른 날, 기쁜 마음으로 갔다가 완전히 기분을 잡치고 왔다.
원래도 대표가 굉장히 통제적이고, 성격이 급한데다 예민하여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제는 심했다.
나는 당연히 계약을 하는 줄 알고 갔는데, 아직 정확하게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며 얼마를 받기 원하냐고 할 때부터 뭔가 어긋나기는 했다. 이미 나는 이 업체와 비슷한 일을 하려다 못한 전적이 있고, 그때 내 견적을 다 이야기했으며, 이후에도 경쟁PT 들어가기 전에 한번 더 물어서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두번이나 들은 이야기를 또 들으려고 미세먼지 자욱한 날 사무실로 불러들였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보다 더 황당했던 건 이미 1년 동안 다른 일로 내게 원고료를 지급해놓고서도 아직 자기는 원고료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내가 받을 돈이니 요목조목 상세히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모른다며? 모른다고 해서 알려줬더니 "가르치려 하지 마라"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대표는 내가 자기에게 화를 낸다며 (화를 낸 적이 없다. 단지 웃지 않았을 뿐이다. 계약금 이야기할 때 웃기 쉽지 않다.) 깐깐하게 따지고 드는 것에 대해 "프리랜서 생활하면서 계약할 때랑 이야기 달라지는 업체 자주 만나셨나봐요?"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선 "니네. 니네 업체가 돈을 제 날짜에 입금을 안하잖아?"하는 말이 자동으로 떠올랐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네. 이 생활을 10년 이상 했으니까 그런 업체 만나죠. 당연히."라고 했다. 
그랬더니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정색을 했다.
난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사람, 그럴 사람 아니야."라고 하는 건 믿을만한 말인지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하는 사람은 바로 딱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대표는 정색을 했던 것이다.
지난 3년간 같은 일을 하면서 매달 들어오는 돈이 늦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 업체가 맡고 부터는 수시로 늦었다. 어떤 달은 한달이 밀려 두달치를 한꺼번에 받은 적도 있고, 매달 일정액을 줘야 하는데(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다) 고의로 누락시킨 적도 있다. 그때마다 사람 구차하게 전화를 해야 돈을 넣어주곤 했으면서, 이번 일에는 "굳이 계약서를 써야 하냐"고 했다. 헐...이번 계약이야말로 날짜까지 박아서 계약서를 쓰려고 했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아는 기자들도 많지만 니가 PT에도 와주고 해서 너를 제일 먼저 불렀다고 했다. 8천원짜리 수제비 한 그릇 사주고 사람을 강남 저 끝까지 오라가라 했으면서, 밤 12시에 카톡 보내고, 1분 인사시키려고 하루종일 저당 잡고, 내 포트폴리오가 필요해서 빌려갔으면서, 이제 와서 너는 을이고, 나는 갑인데 왜 박박 기지 못하냐는 뉘앙스다. 이 대표를 만나고 오면 항상 기분이 안좋은데, 어제는 그 끝판왕이었다. 

사실 이런 업체의 일은 하면 안된다. 프리랜서 생활을 10년 넘게 했으니 나도 촉이 있다. 
욕 한바가지 퍼부어주고 일 안한다고 쿨하게 거절하면 되는데, 지금 내 상황이 그럴 정도로 좋지 못하기에 이렇게 하루종일 기분 나빠 절절 매면서, 가까스로 잠들었다가 새벽 3시에 분기탱천해서 일어나 또 불을 뿜으면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니지만 꺼내지는 못하는 여느 회사원들처럼. 

속초에서의 겨울 읽고

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북레시피

표지 예쁘고, 책 얇고, 한국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작가가 쓴 소설이라니 땡기지 않을 수가. 그러나 우려했던대로 아무런 내용이 없는 소설이었다.
내가 지금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극적인 복수 대하 서사를 읽고 있어서 더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아니야, 보통 때라도 분명 재미없다고 했을 것이다.
강원도 속초의 펜션에서 일하는 나는 한국인 엄마와 프랑스인 아빠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다. 어느 겨울, 이 펜션에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만화가가 투숙한다. 그는 내가 해주는 음식은 안먹고 맨날 편의점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나에게 운전을 해서 이곳저곳을 데려다 달라고 요구한다.
이 이상의 내용을 적을 수가 없다. 내용이 없으니까.
끈질기게 한국 음식을 거부하는 프랑스 남자도 밥맛이었고, 대체 그 남자에게 기대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 '나'도 비호감이었다. 문예창작과나 국문과 졸업생(혹은 재학생)이 쓴 두번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뱁새황새] 더 하우스 1932 살고

지난주 독서모임은 '커피사회' 전시를 보기 위해 가까운 서울역 근처에서 했다. 주소상으로는 만리동에 있는 '더하우스1932'는 후암동 피크닉보다 더 멋진 공간이었다. '더 하우스 1932'라는 이름에서 유추해보건대 1932년에 지어진 집이 아닐까 싶다. 그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카페로 만들었는데, 1층, 2층, 지하까지 허투루 둔 곳이 없고 정말 꼼꼼히 잘 지어져 있었다. 오래되어 좁고 경사가 급한 목조 계단에는 잡고 올라가도록 난간이 부착되어 있고, 머리 부딪치지 말라고 안전 표시까지 붙어 있었다. 
모든 길이 미로 같아서 여길 지나면 또 공간이 나온단 말이야? 하면 틀림없이 공간이 나왔다.
와...요즘 카페들은 이런 식이구나. 요즘 공간들은 이런 식이구나. 감탄하면서 구경했다.

더하우스1932의 외관. 고풍스런 향나무부터 약간 일본식 느낌이 난다.
현관은 빨간 문이었고, 연말에 달아둔 크리스마스 장식이 나를 반겼다.
1층 주문하는 데스크쪽. 가는 목조 대들보와 기둥들이 반가웠다. 
예전에는 집이 이런 식이었지 싶었고.
1층 입구쪽 방. 창문을 따라 소파 자리, 그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었음.
고풍스런 조명과 세로로 긴 격자창, 그 앞의 화분들과 소파.
매우 조화롭고 안락하다는 느낌이 든다. 

 
2층 곳곳의 자리. 햇볕도 잘 들어오고, 의자도 편해 보인다.
요즘 인테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관엽식물들도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격자창으로 내다보면 뭐든 다 예뻐 보이는 희한한 원리.^^
3층은 안전을 위해서 어린이들은 출입할 수 없도록 해놨다.
되게 좁은 계단을 기어올라가듯이 올라가보면 뜻밖에서 이런 풍경을 만난다.
1층과 비슷한 인테리어인데, 조명이 다르고 뒤쪽에 다다미가 있다.
저 소파 뒤의 다다미 자리. 여기는 좌식.
다른 쪽에는 이런 코너도 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다락방 느낌의 자리. 
소규모로 온다면 저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다.
카푸치노와 자몽 에이드. 커피 양이 작은 건 아쉬웠지만, 트레이도 컵도 굉장히 신경쓴 느낌.
문제는 셀프서비스라 이걸 들고 2층이든 3층이든 지하든 오르내려야 하는데, 
목조계단이 굉장히 좁기 때문에 고난이도의 노동이다. 
나는 엄두도 못냈다. 조심해서 옮겨야 한다.
지하에도 이런 식으로 꾸며져 있다. 지하라지만 경사지에 있기 때문에 밖이 내다 보인다.
코너를 돌면 마름모꼴 복도에도 이렇게 예쁜 자리가 놓여있다.

앗...안타깝게도 우리가 모임을 했던 가장 지하의 가장 구석자리를 찍지 못했다. 원목을 켜서 만든 테이블이 굉장히 고급스럽고 예뻤다. 그 중층 지하에 가기 위해 지나는 방도 벽을 뚫어 기다란 탁자를 관통해서 놓았는데, 10명 이상 앉을 수 있다. 거긴 사진을 찍었는데, 흔들려서...ㅠ.ㅠ 하여튼 이 카페는 모든 층과 모든 코너가 제각각 특색이 있으면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공간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힙한 공간이구나 했다. ㅎㅎ
이 카페는 서울로 7017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카페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서울로 7017의 시작점과 만난다.
카페가 오르막과 아파트 사이에 있어서 난개발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그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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