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비유 읽고

위험한 비유
최제훈
문학과지성사

<퀴르발 남작의 성>과 <일곱개의 고양이 눈>까지 읽고 한동안 안읽었던 최제훈. 이번에 리모델링하고 문을 연 서강도서관 가서 서가를 훑다가 새 책이 나왔길래 집어왔다. 굉장히 흥미로운 소설도 있었지만, 뭔가 살짝 2%가 부족하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판타지소설이다.

철수와 영희와 바다 | 튜브를 끼고 사람들 바글바글한 욕탕 같은 8월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연인. 그들의 이름은 교과서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다. 철수는 아직 취준생이고 영희는 직장인. 그 사이의 괴리가 대사로 표현되는데, 서정적인 지문에 비해 대사들이 과격해서 초반부터 흥미로웠다.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하게 읽었는데 그렇게 흘러갈 줄이야...그러게 왜 부표를 넘어가냐고.
2054년, 교통사고 | 초반에는 이게 뭔 소린가 싶은데, 읽다보면 그럴듯하다. 자율주행 시대의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인데, 일부러 자동 교통 시스템을 흩뜨리는 조커의 등장도 그럴 듯 했고, 인공지능이 그렇게 인간을 재빨리 학습한다면 우울한 감정이라고 학습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자동차가 자살한다는 발상도 할만 하다.  
마네킹 | 백화점 기계실에서 일하는 남자가 어느날 백화점 1층의 마네킹을 훔쳐 자기 고시원방에 둔다. 그런데 이 마네킹이 아무래도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다. <공기인형>적 상상력이기도 하고, 섹스돌 생각도 나는 그런 이야기.  
미루의 초상화 | 이쯤 오면 이 작가의 특징이랄까 트루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동차든, 마네킹이든, 초상화든 그런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지막에 미궁 속에 가두는 이야기. 이 소설에는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달라붙는 여자가 나오고, 그 여자와 사랑했던 남자가 여자를 바오밥나무에 버려두고 오는데...마지막에 오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호갱이 된 듯도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유령들 |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과 <식스센스>와 빌 머레이가 나오는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를 짬뽕한 작품. 예전 <퀴르발 남작의 성> 스타일이다.  
마계터널 | 이 소설의 후반부에는 페이지를 넘기면 검은 원이 숨어있다가 점점 커지는 모습이 인쇄되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색 원인데 꼭 지하철 터널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오싹하다. 내용이 지하철 터널에 살고 있는 쥐새끼인지 사람인지 이상한 괴물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장부재증명 | 이 작품 재밌었다. 남자 소설가가 미니세탁기를 중고거래한다. 그런데 자기가 세탁기를 설치까지 해준 집 여자가 피살당한다. 남자는 용의자가 되어 경찰서에 오는데, 남자가 썼던 소설 내용이 너무나 현재 상황과 맞아 떨어지고 결국에는 거짓 자백까지 하게 되는데....원숭이들이 뒤엉켜있는 문신은 뒤의 작품에도 나온다. 그 문신 새긴 여자 이야기가 절묘하게 들어가 있었다. 
위험한 비유 | 한 토막의 장면을 써놓으면, 거기서 한 구절을 따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식으로 쭉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습작 같아서 영 별로였다. 이 작품이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이라 전체적으로 이 책의 재미가 더 내려간 느낌이랄까? 현장부재증명이 마지막 작품이라면 딱 좋았을텐데.

밑줄긋기
82 _ "사회주의가 되면 저 남아도는 물건들이 저한테도 오나요?" "아니, 딱 필요한 만큼만 만들겠지."
181 _ 몸을 둥글게 말아 타인과의 접촉면을 줄이면서 심플하게 사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는 비슷한 연배의 팀장에게나 나이가 절반밖에 안 되는 막내에게나 똑같이 예의를 갖춰 대했고, 그럼으로써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읽고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장강명 | 아작

<산 자들>과 함께 나왔던 SF소설집. 읽어보니 역시 나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SF보다는 현실 기반에 살짝 판타지가 얹힌 쪽을 좋아한다. '아스타틴'처럼 굉장히 긴 소설도 있었고, 2~3p에 끝나는 엽편 소설도 있었다.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_ <이터널 선샤인> 비틀기 버전 같은 건데, 사랑하는 감정을 지속시켜주는 주사를 맞을까 말까를 가지고 다투던 남녀가 결국 다른 남자의 등장으로 끝나버리는 얘기.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_ 다 읽고 나면 "역시 장강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는 사실 한나 아렌트의 글도 안 읽어봤고, 아이히만 재판에 대해서도 잘 몰라서, 이 소설의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어떤 부분을 어떻게 비틀어놨는지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상대의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체험기계가 탄생하자, 유대인들이 아이히만에게 그 기계 사용하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수용소에 있었던 유대인 한명과 아이히만이 서로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뒤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서 계속 읽었고, 하..그렇게 끝날 줄 몰랐다.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있는 게 좋다, 정말 그렇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 _ 다른 건 모르겠고, 머리 잘린 엄마는 정말 그로테스크했다....으으으. 작가의 말에 보니 자기 몸에 대한 소유권을 침해당한 여성과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이 연대해서 억압에 맞서는 이야기라는데, 그렇게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마지막에 그렇게 <마션>스럽게 끝날 줄이야. 그렇게 오면 몸과 머리는 다시 붙는 건가...
센서스 코무니스 _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 화자가 장강명 자신으로 나오고, <댓글부대>의 에필로그 같은 느낌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센기획 실장이 혹시 다음소프트의 송길영이 아닐까 잠깐 추측했다. ㅎㅎ 
아스타틴 _ 햄릿의 4대 비극을 가져와 꾸민 우주계 지도자(혹은 후계자) 찾기. 초반에는 뭔 소린지 알아먹지를 못해 애먹었고, 중간은 마블 영화나 왕좌의 게임류 이야기처럼도 느껴지다가 마지막에 초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버릴 때 약간 통쾌했다. ㅎㅎ 정치판 이야기로 대입해 읽어도 될 듯. 
데이터 시대의 사랑 _ '가타카'의 세계에서 연애하기. 로맨틱 코미디의 트루기를 그대로 가져와 만든 이야기인데 상콤하니 재밌었다. 그러니까 확률과 통계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연애하면 좋은가? 재밌나? 역시 나는 아날로그 세대인듯.
그 외에 여신을 사랑한다는 것,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알골,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등이 있다.  

밑줄긋기
32 _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감각이지만,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은 그 감각을 재료로 한 인지적 구조물이에요. 이 구조물은 체험 순간 이후 상당한 시간에 걸쳐 형성되며, 때로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꾸준히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일부는 사라지기도 하고, 일부는 강화되기도 하죠. 다른 디그램 세포체와 섞여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런 편집은 장기 기억의 본질적인 특성이에요.
63 _ 고통이 곧 악일까? 종종 정의와 진실이 사람들을 괴롭고 불편하게 하고, 악이 가장 달콤하지 않던가?
73 _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 있는 게 좋다.'
82 _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132 _ '진짜 감정'의 힘은 강력하다. 가짜 몸뚱이와 가짜 대사와 가짜 설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짓들이 위태롭게 걸린 상태에서도 전체 그림이 어색해 보이지 않게 우뚝 서서 지지대가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감정의 격류에 휘말리고 싶어서 극장에 가고 TV를 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343 _ 야비하게 잘생긴 건 또 뭐야. 송유진이 웃으며 물었다. 만나보면 스릴이 있을 거 같은데 깊이 사귀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는 얘기지.
351 _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줘'라는 송유진의 말이 더 이상 로맨틱하게 들리지 않음을 이유진은 그때 깨닫고 놀랐다. 너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내가 너의 신부가 돼야 하는 건 아니야. 나는 내 행복을 위해 결혼하는 거라고.
356 _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측이나 분석이 아니라 행동이다. 언제나.
367 _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미래가 어떨지 몰라야 사랑하고 모험하고 발견하고 결단할 수 있다.

 

한숨의 기술 읽고

한숨의 기술
임소라 | 디자인이음

<대형무덤>과 <도서관람>은 재밌었는데, 이 책은 영....
나는 몰랐는데 임소라가 수원에서 독립책방도 했었나보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읽고도 한숨이 나왔는데, 그때 이 책을 같이 읽었다면 싸잡아 독립책방 하는 사람들은 다들 왜 이런가 욕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책과 굉장히 비슷한 스텐스에 비슷한 경험이들어있다. 이런 폐업기들을 읽다보니 '헬로 인디북스' 대표가 쓴 책이 왜 매진이 됐는지 알 것 같다. 
시집처럼 작고 얇은(94p) 책인데, 그나마 왼편에만 임소라의 글이 적혀 있고, 오른편에는 다른 독립출판에서 발췌한 글이 실려 있다. 나는 밑줄긋기라 생각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다른 독립책방과 독립출판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뷰 메일을 보내 답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거든 저거든 하여간 실질적으로 저자의 글이 적혀 있는 페이지는 겨우 40p 좀 넘는다는 소리다.
책의 제목인 '한숨의 기술'은 한숨을 쉬는 기술이 아니라 서술한다 할 때의 그 '기술'이다. 한숨을 서술한다는 말이니 결국 독립책방 폐업기라는 소리다.
책의 내용 중에 한숨에 관한 글이 나오는데, 공감이 가서 적어둔다.

한숨을 쉬는 사람에게 
왜 한숨을 쉬냐고 
핀잔주지 마세요.
적어도 그 사람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진 않을 테니까요.
책임을 포기하고
외면하는 데에 익숙한 이에겐
한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죠.
적어도 한숨을 쉬는 사람은 말이죠.
휴.
한 번 크게 숨을 쉬고, 
어떻게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입니다. ('매거진 다봄'2호에 실려있는 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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