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읽고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원더박스

은퇴를 앞둔 노교수의 마지막 '창조적 글쓰기' 강의록이다. 제목도,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좌명도 기대되는 바가 없어,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가 들고 다닐 얇은 책이 없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고 그런 글쓰기 책이 아니었다.

모국어가 빈약해지면 지적 창조가 안된다는, 그러므로 '글로벌' 어쩌구 하는 교육으로는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프롤로그부터 이미 이 교수님의 주장에 넘어간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는 작가도 자신이 뭘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부분과 어쨌든 그 글이 끝나는 것에 대한 상상을 해야만 글을 끝마칠 수 있다는 부분에 와서 완전히 확 넘어갔다. 글 쓸 때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이토록 논리적으로 꼼꼼히 분석하여 이야기해주는 책이라니!
매 장마다 감탄하며 읽었다. 글을 오래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혹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하루키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하루키가 더 잘 쓴 다른 일본 작가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유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읽어보면 그럴 듯하다. 역사에 따른 세대별 트라우마라는 것은 참 어쩔 도리가 없다 싶기도 하고.
또 하나 놀랐던 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계급차이. 프랑스 철학책들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걸 보면 일본과 우리나라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보이는 잉크니 보이지 않는 잉크 전략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군 싶기도 했다. 어려운 학문분야를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하려는 일본인들의 의식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걸 좀 비웃었던 나를 반성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현대의 학문이 깊게만 파고 들어가 지도교수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걸로 바뀌어버린 현상으로 이어져, 모든 학문은 기본적으로 '증여'라는 부분에 오면 또 한번 감탄이 나온다.
마무리, 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전자책이 땡기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마무리감이 없어서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하면 '진심을 다해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글'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그 말은 어떻게 보면 김영하의 '진심은 잘 설계된 우회로를 따라 전달된다'는 말과 상충하는 말 같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우회로를 그리는 이유가 바로 내 글이 제발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진심에서 우러난 거니까.
제목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 정말 좋았다.


밑줄긋기
7 _ 영어를 솜씨 좋게 구사하게 되었다는 것은 '영어를 모어로 삼는 종족의 사고방식, 감각'을 내 몸에 새기고 각인시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사람들은 실로 자각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9 _ 이렇듯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위를 손에 쥐고 새로운 사용법을 생각해냈다고 해서 가위가 그것에 맞추어 모습이 바뀌고 재질과 기능이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모어에서는 일어납니다. (중략) 그러므로 모어가 앙상하게 야위는 현상은 해당 언어집단의 지적 창조에 치명적입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제국은 어디에서나 식민지 현지인에게 자신의 언어를 습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종주국의 언어는 강국의 언어이면서 당연히 '글로벌'한 언어니까 피지배 식민지인들이 그 언어를 습득하면 정치적, 경제적, 학술적으로 실력을 쌓을 수 있고, 또한 국제사회에서 이전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러한 실례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24 _ 창조는 '당치 않게 새로운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가 지닌 창조성은 독자에게 간청하는 강도와 비례합니다. 얼마나 절실하게 독자에게 언어가 전해지기를 바라는지, 그 바람의 강도가 언어 표현의 창조를 추동합니다.
98 _ 우리는 스스로 글을 쓰면서 어째서 이 말을 선택하고 그 밖의 말을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질문을 던진 방과 말을 선택한 방이 다른 방이기 때문입니다.
103 _ 이상한 일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미 일을 끝낸 자신'이라는 전미래적인 환상에 동화하지 않으면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것도, 모터사이클의 코너를 돌 때도, '확률론적인 과정'입니다. 
116 _ 트라우마는 '적정하게 언어화할 수 없다'는 무능력 자체가 인격의 근원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는 경험을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은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사람'과는 이미 다른 사람입니다. 
201 _ '거두는 돈'과 '들어가는 돈'을 계산해 아이들 때문에 '들어가는 돈'이 많으면 '낳지 말라'고 하고, 아이들 때문에 '거두는 돈'이 줄면 '낳으라'고 합니다. 결국에는 출생아 수를 '경비와 수익'이라는 잣대로 측량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202 _ 역설적이지만 저출산 정책과 아동 학대는 사상적으로 동일합니다. 출산과 육아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빠져있습니다. 
252 _ 목소리를 내어 읽거나 '베껴 쓰기'를 하는 등 신체를 사용하면 뇌의 재조직화에 눈에 띄게 속도가 붙습니다. 신체를 매개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2 _ 외국어는 애초에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는 자기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외부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267 _ 클리셰는 본래 인쇄 용어입니다. 활판 인쇄 시대에는 빈번하게 나오는 상투 어구의 활자를 하나하나 집어내는 일이 귀찮으니까 식자공이 처음부터 활자를 묶어둔 것이 바로 클리셰입니다. 
288 _ 그들은 학술 연구가 본질적으로 증여라는 것을 모릅니다.
316 _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반드시 '반복'이 있는 법입니다. 미묘하게 음조가 다른 반복이 이어지다가 이야기의 수준이 겨우 한 눈금만큼 깊어집니다. 




2019년의 향수들 살고

나의 향수 사용기

윗글에 이은 10년 만의 향수 이야기. 위의 두 글은 2009년에 썼던 글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니 그때 쓰던 향수들은 다 썼거나 변향되어 버리거나 해서 내가 쓰는 향수들이 대거 바뀌었다. 요즘 회사에서 시간나면 매일 들어가 보는 곳이 향수사랑 카페다 보니 부쩍 향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지금의 내 향수에 대한 기록도 할겸 끄적여본다. 

지금 현재 내가 쓰고 있는 향수는 요 7개가 전부다. 분홍색 더바디샵 핑크 그레이트프룻 오드뚜왈렛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브로쉐 에너자이징 오드뚜왈렛 만다린.레몬.시더, 비오템 로 오드뚜왈렛, 엘리자베스아덴 그린티 유자, 겔랑 아쿠아 알레고리아 빰쁠륀느, 에르메스 르 자르뎅 드 무슈 리, 조말론 와일드 블루벨 코롱이다.

일단 별로인 것부터.
엘리자베스 아덴 그린티 유자 : 내가 산 건 아니고 선물 받았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덴 그린티는 무엇과 콜라보를 하면 안된다. 그냥 오리지널 그린티가 제일 좋다. 그린티는 내가 딱 좋아하는 향인데, 단 하나 지속성이 너무나 짧다는 게 흠이다. 뿌리고 5분 정도 기분좋고 바로 향기가 없어진다. 그게 유일한 단점일뿐 향기는 참 좋은데, 그린티와 콜라보해서 나오는 향수들은 죄다 별로다. 유자도 마찬가지. 이 향수는 뿌리면 알콜 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잔향이 쇳냄새다. 유자냄새가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그린티처럼 부드러운 잔향도 아니다. 매번 뿌릴 때마다 "으으...이거 이랬지."하면서 찡그린다. 그러니 몇년이 지났는데도 이게 아직 남아있다.
에르메스 르 자르뎅 드 무슈 리 : 이 향수 역시 매운 쇳냄새가 난다. 나는 에르메스의 이 시리즈를 꽤 좋아하는데, 그 중 운 자르뎅 수르닐이 발군이었다. 풍성한 그린향이 확 피어오르다가 깊은 숲 냄새로 수렴했는데, 무슈리는 그런 중첩적인 향이 아니다. 아주 단순한 향이고, 끝은 쇳냄새로 수렴해 영 별로다. 여행갔다가 면세점에서 직접 향을 맡고 들인 건데도 왜 이런지 모르겠다. 향수카페에선 이 향수 좋다는 사람도 많고 수박 냄새가 난다는 사람도 있는데, 내 코에선 수박냄새가 아니고 인공적인 풀냄새 같아 돈이 아깝다. 흑. 
처음엔 잘못 샀다 싶었으나 의외로 괜찮은 것.
조말론 와일드 블루벨 : 원래는 조말론의 유명한 라임 바질 앤 만다린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면세점에서 시향하다가 와일드 블루벨에 치였다. 독특하면서도 좋은 냄새라 바로 겟했다. 그런데 막상 들여와서 뿌려보니 역했다. 파우더리한 물비린내인데, 파우더리한 잔향도 내 취향은 아니고, 처음에 확산되는 물비린내도 맑고 깨끗하기 보다는 안개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망했다 생각하고 한동안 처박아놨다가 어느 비오는 날 뿌렸는데, 넘나 좋은 거다. 이 향수는 컨디션을 따지는 향수 같다. 어떤 날은 너무 싫다가, 어떤 날은 너무 좋다가 한다. 와일드 블루벨은 야생 은방울꽃 냄새라고 하는데, 마콥 레인에 파우더리한 우유 느낌을 더했다고나 할까? 안개낀 런던 아침 같은, 안개 속을 걸어가는 스카프 두른 여자 같은 느낌. 남들은 여름에 뿌린다는데, 나는 비오는 날이나 좀 쌀쌀한 가을에 딱 어울리는 향수 같다.
겔랑 아쿠아알레고리아 빰쁠륀느 : 이건 향수카페에서 중고품을 벼룩으로 들였는데, 처음엔 코를 찡하게 하는 오줌냄새가 나서 망했다고 생각했던 향수다. 그런데 거기 적응하고 나면 의외로 중독성이 있는 향이다. 빰쁠륀느는 자몽이라는 뜻. 내가 자몽향을 편애하기도 하지만, 이 향수는 생자몽향과는 거리가 있고, 특유의 코가 찡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게 꽤 매력적이다. 내 향수들 가운데 가장 덜 추운 냄새라서 겨울에 주로 뿌린다. 올 겨울에 열심히 뿌려서 바닥 보는 게 목표.

좋아하고 즐겨 뿌리는 향수
이브로쉐 에너자이징 오드뚜왈렛 만다린, 레몬, 시더 : 이브로쉐의 이 라인 향수는 올리브영에서 판매한다. 가성비 좋은 향수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만큼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향이 마음에 든다. 자주 뿌려서 산 지 2년도 안됐는데 벌써 다 써간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조말론 라임바질앤만다린의 저렴이 버전이라고 한다. 나는 그건 안맡아봐서 잘 모르겠고 아덴 그린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에 적혀있듯 오렌지, 레몬향이다. 분사력도 좋아서 한번 누르면 분무가 확 퍼지는 것도 마음에 든다. 가성비 좋고, 향도 좋고, 그린티보다는 지속력이 있어서(그래봤자 한두시간이지만) 앞으로도 만만하게 자주 쓰고 싶은 향수.
비오템 로 오드뚜왈렛 : 이 향수는 예전에 터키 여행 갔을 때 터키 공항 면세점에서 시향해보고 마음에 들었는데 고민하다 그냥 놓고 나온 향수다. 근데 그때부터 어찌나 미련이 남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다 최근 동유럽 여행 다녀오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판촉행사를 하길래 겟했다. 보기엔 파란색이라 시원한 물향이 날 것 같지만 레몬이나 오렌지향이다. 시트러스 계열치고는 지속력도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 면세점에선 비오템 화장품만 팔지 향수를 잘 팔지 않는다. 유럽 공항에선 자주 봤는데, 공항마다 가격이 다르니 판촉행사 하는 곳에서 사는 게 이득. 나도 이벤트하는 면세점에서 10유로쯤 싸게 샀다.
더바디샵 핑크 그레이트프룻 오드뚜왈렛 : 최근 더바디샵에서 화이트머스크'로'가 나왔다. 화이트머스크는 워낙 유명한 스테디셀러이지만 머스크향 별로 안좋아하는 나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거기에 '로'가 붙으니 확 끌렸다. 거기다 향수병도 보라색이 아니고 민트색이라 마음에 들었다. 향수카페에서 바디샵 세일할 때 화이트머스크로 사라며 뽐뿌넣는 사람들이 있어 주말에 시향하러 갔다. 나쁘지 않았다. 탑노트가 신선해서 머스크인데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에 사면 하루종일 돌아다니기에 무거울 것 같아서 일단 시향만 하고 나왔다. 돌아다니다 보니 내 몸에 남은 향은 너무 흔한 향이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런 똑같은 향을 사느니 내가 바디샵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몽향을 사는 게 낫겠다 싶어 결국 인터넷으로 자몽향을 주문을 했다. 어쩐지 1만원대의 싼 가격이다 했더니, 이렇게 작은 향수가 올 줄 몰랐다. 30ml가 이렇게 작구나! 뿌려보니 바디젤에서 나던 냄새 그대로 생자몽향이 났다. 아주 마음에 든다. 30ml가 너무 작아서 아껴쓰고 있지만, 다 쓰면 큰 사이즈로 사고 싶다.

이게 현재 내가 쓰는 향수들이다. 향수사랑 카페를 드나들며 모든 글을 찬찬히 읽은 결과, 나는 이솝에 가서 테싯과 휠을 시향해보고 싶다. 어쩐지 나랑 잘 맞을 것 같다.
10년 전만 해도 니치향수가 대세는 아니었는데, 요즘 향수카페에선 니치향수 아니면 취급을 안하는 분위기다. 틈새라는 뜻의 니치향수는 이름 자체가 이미 마이너인데, 요즘은 메이저 향수 메이커들을 패션향수라고 깔아보는 분위기라 영 마뜩찮다. 조말론만 겨우 한두번 맡아본 나에게 니치향수의 세계는 너무 멀고 광활하다. 괜히 발 담갔다가 통장 거덜날 것 같아 이솝 정도만 시향해보는 걸로 타협하려고 한다. 

여주 나들이 살고

평일에는 출근하고 주말에는 국회도서관 가서 글쓰다 보니 여행이란 걸 가질 못한다. 이럴 줄 알고 물론 헬싱키와 부다페스트를 다녀왔다만 그건 너무 먼 옛일이라 기억도 안난다. ㅠ.ㅠ 그래서 공포영화제를 여주로 간다는 말에 어찌나 기대를 했던지! 
그런데 출발하기 전날부터 허리가 좀 아프더니, 아침에 일어나 멀쩡히 밥 잘 먹고 설거지까지 했는데, 그때부터 급격히 허리가 아픈 거다. 굽혀지질 않았다. 평소에 이 정도로 허리가 아팠으면 일정 다 취소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 맞았을 거다. 그러나 얼마나 고대했던 여행(콧바람)인가. 게다가 아프기 시작한 시간이 애매해서 한의원에서 침맞을 시간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부여잡고 낑낑대며 준비를 해서 나갔다.
노란고무줄과 핸드폰으로 급조한 네이게이션. ㅋㅋㅋㅋ

사실 허리 아플 때 제일 쥐약인 자세가 앉아 있는 자세다. 방바닥에 좌식으로 앉아 있는 게 제일 힘들고, 그 다음에 자동차에 타서 앉아 있는 자세 아닌가 싶다. 2시간씩 자동차에 앉아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날 좋은 주말이라 차는 밀리고....이를 악물고 갔다. 중간에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내려 장을 봤는데, 거기서도 허리에 뒷짐지고 어슬렁어슬렁 환자처럼 다녔다. 허리 아픈 관계로 이번 여행에선 아무 것도 안했다. 마지막날 설거지 한번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한의원을 찾아나섰는데, 토요일이라 1시에 문을 닫았다.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 ㅠ.ㅠ
저녁을 먹고 부른 배를 꺼뜨리러 산책을 나갔다.
한강 옆으로 산책로가 정말 잘 정비되어 있었고, 벚나무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아...좋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주는 세종대왕릉이 있다는 이유로 한글 특화도시처럼 꾸며져 있었다.
산책로 곳곳에 용비어천가니 한글과 관련된 구조물이 서 있다.
용비어천가 뒤로 빨간 목욕탕 마크의 모텔 네온사인이 웃겨서 찍어봤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막 반짝거리면서 조명으로 기둥마다 흘러다닌다.
가뿐히 1만보를 넘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남들 떡볶이 먹으며 영화볼 때 나는 잤다. 허리 아플 때 푹신한데서 자면 더 안좋아진대서 침대방에 이불 깔고 바닥에서 잤다. 아픈데도 허리를 굴리고 운동을 해서 그런지 아침에 약간 나아졌고, 목욕탕을 다녀와서 약간 더 나아졌다. 목욕탕 안에서 아줌마 한분이 대차게 미끄러져 대짜로 뻗는 사고가 있었고, 내가 저랬으면 그대로 119 실려갔겠다 싶어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렇게 아침밥 먹고 숙소 정리를 하고 체크아웃한 뒤 여주한글시장으로 향했다. 여주한글시장에 대해 잘 조사해온 언니에 따르면 원래 경기도에서 가장 큰 5일장이 여주에서 열리는데, 그 5일장이 상설시장에 덧붙여 열리고, 그 상설시장의 이름이 여주한글시장이라고 한다. 
과연 한글시장 다웠다. 위에 만국기처럼 한글 자음이 빼곡히 붙어있는 인테리어.
시내를 관통하며 이렇게 끝까지 있다.
일루미네이션도 멋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린 아침에 갔기에 보진 못했다.
북어대가리가 저렇게 망에 넣어 매달려 있다. 뭔가 현대미술스러움. 멋져!

시장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망원시장 같은 건 명함도 못내밈. 진짜 사거리를 한번 건너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나와있는 농산물, 식품할 거 없이 싱싱하고 싸고 너무 좋았다. 1시간 뒤에 이천쌀밥을 먹기로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정신줄을 놓고 여기서 온갖 것들을 다 사먹었을 것이다. 점심밥 때문에 시장 음식을 먹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다들 입맛만 다시며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 장보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았지만 참고 참아 김과 명란젓만 사들고 나왔다.
 
손수 빚으시는 만두.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츄릅 | 직접 만들고 있는 유과와 한과.
강정은 후배가 사서 하나 먹어보라며 줬는데 입에서 살살 녹고, 고소하고. 하...진짜 사오고 싶었다.
한글시장답게 중간중간 한글빵 파는 카페도 있고, 세종대왕 동상도 있다.
인사동처럼 모든 가게의 간판이 한글이었는데, 세종대왕 뒷배경으로 올포유는 뭔가 아이러니했다. ㅋㅋㅋ
여긴 진짜 5일장 서는 날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해외의 시장들보다 훨씬 나았다. 아주 맘에 듦.
먹고 싶은대로 먹지 못하고 참고 시장 구경한 뒤 쌀밥 정식을 먹으러 갔다. 대궐같은 식당의 금연구역 마당에 국화가 너무나 소담&화려하게 피어있어 한컷 찍어봤다.
그래도 일찍 오길 잘했다. 만약 1~2시간만 더 늦었다면 나는 자동차 안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4시간 이상을 버텨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의 마지막 주말을 만끽학 돌아오느라 도로가 끝장나게 막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일지 모를) 콧바람을 넣고 왔다.

2019. 11. 9~10 (여주 일성콘도 / 남한강변 / 여주한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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