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하논분화구 살고

고근산을 넘어가면 7-1 올레의 막바지에 이른다. 외돌개가 종착지인데, 고근산 내려와서부터 외돌개까지는 아주 힘들다.
심지어 우리는 서호마을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나마 날이라도 흐렸기에 망정이지, 햇볕이 쨍쨍했으면 우리는 중간에 택시 불러 숙소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늘 하나 없는 아스팔트 길을 하염없이 내려가야 했다.

초반에는 매우 자주 보이는 듯하던 화장실도 그 길에는 없었다.
(화장실 표시는 왼쪽 사진과 같이 눈에 잘 띄게 붙어 있다)
큰 도로 모퉁이에서 '퇴계촌'이라는 식당에 올레꾼을 위한 화장실이 있다는 표지를 보고 들어가 볼 일을 봤다. 
그날 이후 서귀포 쪽으로 차를 몰고 가며 몇번이나 '퇴계촌'을 봤는데, 그곳은 우리에게 영원히 올레 화장실로 기억될 거라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ㅋㅋㅋ 


다행히 길 가에 꽃들이 피어 있어서 고단한 여정에 위로가 되었다.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웠던 동백꽃 (10월에 동백이라니...)

산에서도 골목어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곰취꽃 (처음 보는 꽃이라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국화를 닮은 꽃도 예쁘지만, 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긴 잎이 진짜 인상적이다.

이렇게 바닥에 하얀 시트를 깔아 햇볕을 반사시키는 재배법을 '타이빽'이라고 한단다.
이렇게 키우면 아래쪽의 귤들도 햇볕을 잘 받아서 덜익지 않고, 고루 익는다고 한다. 노지에서도 비닐하우스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나? (일행 중 똑똑한 식품 MD가 가르쳐주었음.^^)
 
이렇게 설렁설렁 멋대가리 없는 동네들을 지나서 하논 분화구로 들어왔다. 움푹 패인 지형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분화구일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며 지도(제주 올레사이트에서 뽑아온 지도)를 펼쳐보니 '하논 분화구' 라고 한다.

대체로 이런 황폐한 평원이 펼쳐진다.

옆으로 올레길.
괜찮아 보이지만, 실은 옆 개울에서는 악취 나는 물이 썩어가고 있다.
평원에서는 말이 풀을 뜯고

밭에서는 상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외롭게 혼자 콩밭 매는 할머니 뒤로는 '살인의 추억'에 나올법한 허수아비가 서 있다.


이미 서호마을에서부터 느꼈지만, 하논 분화구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올레길은 최대한 많이 걷게 설계되어 있다는 걸. -.-; 화살표 따라 걷다 보면 아까 봤던 곳이 나오고(하지만 교차로라 긴가민가하다), 나중에 이러저리 걷다 보면 결국 출발한 그 곳에 와 있더라는 것. -.-; 진정 걷기를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이때쯤 오니 발바닥에 열이 화끈화끈. 죽을 지경이었다. 아침 10시에 시작한 걷기가 4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제주 올레] 고근산 살고

엉또 폭포를 내려와 마을 하나를 지나면 산길로 접어든다.

이름하여 '고근산'이다. 그런데 올라가는 초입에 '등반로'가 아니라 '산책로'라고 적혀 있었다.
올라가며 보니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고, 운동기구도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힘들게 올라갔지만, 이 곳 주민에게는 역시 등산이 아니라 산책이었던 거다. -.-; 15년 전 우리는 땀 뻘뻘 흘리며 올던 남해금산을 굽높은 슬리퍼에 홈드레스 입고 부부싸움 하며 오르시던 아주머니 생각이 불현듯 난다.

그러나 산책로든 뭐든, 산은 산이다. 정상에 서면 이런 광경이 우리를 반긴다!

우오오오~ 서귀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흐린 하늘이라 더 멋지다!!!

정상에는 망원경도 마련되어 있어서 서귀포 앞바다를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땀을 닦고, 싸온 과일을 깎아먹고, 한참을 벤치(정상에 망원경 앞에 벤치를 마련해놓았음)에 앉아서 쉰 후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7-1 올레는 고근산 올라오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멋있다. 올라올 때는 나무에 가려서 아무 것도 안보이고 그저 길만 따라갔는데, 올라갈 때는 능선을 따라 시야가 트이니까 시내는 물론 한라산이 눈앞에 있었다. 넘넘 멋졌다.


보이는가? 농담의 조화가 동양화 같은 한라산. 한폭의 풍경화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런 식으로 올레길이 되어 있다. 이 산 정상에서 비즈니스 전화를 받기도 하고(^^;;), 노루를 보기도 했다. 정확히 노루인지 사슴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가던 언니는 2번이나 봤고, 한번에 두 마리를 보기도 했다. 안경 끼지 않은 나는 숲 사이를 뛰어가는 노루의 형체만 어렴풋이 한번 봤다. 그래도 산에 그런 동물이 살고 있다니, 매우 신기했음.
많이 힘들지도 않고, 경치도 일품인 고근산, 강추한다.

(2009. 10. 30. 고근산)

하우스 읽고

하우스
박정석 | 웅진지식하우스

서울이 집이요,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게 일인 여자 소설가가 강원도 바닷가에 집짓는 이야기다.
이미 [나의 프로방스]나 [타네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를 통해 집짓기가 얼마나 지난하고, 사람 복장터지게 하는 작업이면서도 독자에게는 재미와 웃음을 주는 일인지 터득했기 때문에 이 책도 재미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읽게 되었다.
예상대로 땅을 사는 일부터 뭐 하나 녹록치가 않다. 무덤이 근처에 있다고 질색하는 저자에게 "나는 제주도에서 집 옆에 무덤 있으니 참 좋더만.." 했다가, 무덤이 1개가 아니라 4개라는 말에 기겁했다. 물론 집주인이 개시도 안한 변기를 누가 먼저 사용하면 싫겠지만, 그렇다고 인부들 화장실도 마련해놓지 않고 변기 뚜껑 위에 책 쌓아올려 놓았다는 부분에서는 '참 깍쟁이다' 싶었다. 
골수 서울 사람인데다 여자인 작가가 집짓는 6개월 동안 얼마나 거칠어지고 못된 건축주가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나온다. 자기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일은 아마도 다 이럴 것이다. 
그래도 나중에 지어진 집 보니까 꽤나 그럴듯 했다. 이 정도 결과면 그 정도 고난이야 잊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남의 일이니까 그렇지, 실제로 집을 짓는다면 나라고 이 여자보다 나을리가 없다.
언젠가 아는 오빠가 자기 집 인테리어 공사하는데, 나더러 일당 10만원씩 받고 감독을 해보지 않겠냐고 했었다.
언니도 오빠도 맞벌이 부부라 나한테 부탁한 거 였는데, 평생 집을 지어보기는커녕, 내 방 벽지 한번 발라본 일 없는 나에게 뭘 믿고 전화했을까 싶어 더럭 겁이 났다. 결국 거절했는데, 아마 열흘 동안 그 일을 했더라면 다른 건 몰라도 소설 한편 쓸 정도의 경험은 되지 않았겠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 같으면 해봤을텐데...ㅎㅎㅎ
이 책은 [낭만적 밥벌이]의 개인 주택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유머는 빠진다고 보면 되겠다. 이런 책이 언제나 그렇듯이, 작가 자신의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난다. 그나저나 궁금한 것은, 대체 왜 같이 살면서도 남편(인지 동거인인지)은 그녀를 하나도 거들어주지 않았을까? 매우 궁금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내 남편이 이 책의 L처럼 주둥이만 놀리고,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대략 이혼 직전까지 갔을텐데, 저자는 남편을 무지 사랑하나보다. 별로 원망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안부장이나 찬장자리에 옷장 짜넣은 싱크대 사장님보다 L이 더 밉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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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존재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편견도 한 사람, 변화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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