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읽고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비채

네이버 오늘의 책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읽고, 재미있겠다 싶어 빌렸다. 
책날개에 써있길, 일본 소설인데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처럼 건조한 하드보일드 문체란다. 주춤했다. 같이 빌려온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을 먼저 읽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두꺼운데다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 같다면, 이거 문제가 있겠네...했지만, 역시 일본 소설! 타 일본소설에 비해 하드보일드한 것은 틀림없으나, 미국것들처럼 사람 말려죽일 묘사는 아니다.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거의 5백페이지에 육박하는 긴 소설인데, 마지막 한챕터를 남겨두고도 누가 범인인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 범인 알고 싶어 애닳아 죽는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니! 세팅도 탁월하고, 마지막 1/5지점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다.  
나는 그쯤에서 "주인공이 범인이라고 하기만 해봐" 우려를 했다. 아무리 읽어도 주인공 외에는 범인으로 떠오를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작가는 그런 페이크는 쓰지 않았다.
앞의 4/5에 비해, 별 관계 없던 사람이 용의선상에 떠오르는 마지막 부분은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
사설 탐정 사와자키는 어느 날, 의뢰 전화 한통을 받고 의뢰인의 집에 찾아갔다가, 6천만엔이 든 여행가방을 던지며 "내 딸을 내놓으라."는 남자와 대면하게 된다.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했는데, 별안간 경찰들이 사와자키를 체포하고, 결국 그는 얼굴도 모르는 11살짜리 소녀의 몸값을 가지고 범인과 교섭하러 가게 된다. 하지만 일이 꼬여 6천만엔이 든 여행가방을 도둑맞게 되고, 공범으로 몰리게 되는데....
 

밑줄긋기
57 _ "작가는 등장인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멋대로 움직이려는 그 인물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105 _ 늘 그랬다. 탐정 일은 대부분 차선책에 의존해야만 했다. 최선책은 시간 부족이나 일손 부족, 경비 부족 때문에 혹은 단순히 불법 행위라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7 _ 젊은이들이 반드시 상식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식있는 행동을 하려고 명심하고, 노력하고, 결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시간은 약간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에겐 늘 시간이 부족하다.

성난 서울 읽고

성난 서울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꾸리에


마포도서관에는 희한하게도 우석훈의 책이 거의 없다. <88만원 세대>는 예약차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딴사람한테 빌려 읽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등등)은 분명히 들어와 있기는 한데(그것도 2권씩), 모두 7~8월에 빌려간 사람들이 가져오질 않았다. 이 책 <성난 서울> 역시도 도서관 홈페이지에는 비치되어 있다는데, 가서 찾아보면 없다. 아무래도 누군가 우석훈 책만 앙심을 품고 가져가서 없애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책들을 국회도서관에서 읽는다. 그의 책을 몇권 갖다놓고 어떤 걸 읽을까 고르려고 앞의 몇페이지만 들추다가 이 책이 가장 재미있어서 읽게 되었다. 우석훈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게 되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아마미야 카린이라는 일본 여성이다. 원래 극우파의 록밴드를 했던 여자라고 한다. 그러다 젊은 세대들의 빈곤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이제는 완전한 좌파로 돌아선 사람이다. 한국의 젊은이들과 일본의 젊은이들(그 중에서도 비정규직인 프레카리아트)이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건너와서 겪은 여름 동안의 일을 적어놓은 기록이다. 
처음엔 펑크록밴드 했던 여자가 써봐야 얼마나 쓸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 여자, <불량공주 모모코>의 여주인공 복장으로 다닌다. 머리에 레이스 두건 쓰고, 레이스 달린 메이드복을 입고서는 확성기를 들고 "집세를 내려라!" 같은 구호를 외치는 여자라니! 우리 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그런데 이 여자, 정말 글을 제대로 쓴다. 빨려 들어가듯 책을 읽었다. 우석훈처럼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믹스하여 너무나 공감가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잘 쓴다. 튀기 위해, 건성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무려 한달에 걸쳐, 그나마 국회도서관 나오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가 될까말까 한데도 놓지 않고 찔끔찔끔 결국 끝까지 읽었을까?  
기륭전자, 부시 방한시 벌어졌던 반미 집회, 외국인 노동자 관련법, 징병 거부, 스쾃 등등 내가 이글루스나 신문에서 딱딱하고 심각하게 읽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다 나와 있다. 그것도 이해하기 쉽게, 일본과 비교해가며.
부제가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젊은 세대건 아니건 일단은 앞부분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나처럼 빨려들어가 결국 읽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지 않을까?  

밑줄긋기
93 _ "빈곤은 자기 책임이 아니다" "집세를 내려라!"
120 _ '어디서도 공짜로 있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늘 우리에게 자유대신 절망을 안겨주는 현실
154 _ 인문학이 가장 필요한 것은 사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왜 자신이 지금 이런 상황에 있는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이니까요.
157 _ 최종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니까요. 즉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리하고 싶지 않다는, 아니 하지 않겠다는 게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191 _ 경제 위기가 올 때마다, 어느 나라에서나 고통은 결코 분담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전가된다. 이제는 그 고통을 전가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폭이 과거처럼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차이일 뿐.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읽고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김경 | 웅진지식하우스

오래 기다렸던 김경의 새책이 나왔다. 여행기라길래 제목만 보고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에 갔다온 이야기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란 영국 여왕님이 궁전 직원들에게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쉬라고 주는 독서휴가를 일컫는 말이란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님도 그런 휴가를 관리들에게 줬다고 한다. 부럽기도 하여라~. 확실히 옛 시대에는 낭만이 있었어. 여유도 있었고.
어쨌든 그리하여 잡지사 기자인 김경은 책 읽으려고 아예 사표를 썼는데, 너그러운 상사를 만난 관계로 1년간의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을 얻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책 읽는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부럽기도 하여라2.

한두군데를 간 게 아니다. <몰타의 매>라는 영화(혹은 책)에 나오는 몰타에서 시작된 여행은 베네치아, 나폴리, 부라노, 무라노 등의 이탈리아를 거쳐, 포르투칼 리스본, 스페인 바르셀로나 찍고, 동유럽의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탕헤르를 거쳐 아프리카 나미비아, 케이프타운까지 갔다가 안나푸르나 트래킹까지 한다. 부럽기도 하여라3. ㅠ.ㅠ

그 중에서 나를 달뜨게 만든 곳은 역시 바르셀로나. 약 4년 전부터 바르셀로나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뉴욕 다녀온 후 쑥 들어갔는데, 이 책은 다시금 내 입에서 바르셀로나 타령이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바르셀로나에 가야겠다.(결심 결심!)
이렇게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김경은 책을 읽는다. 인생의 본질은 선을 긋는 것이라는 문장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던 존 버거의 <여기, 우리는 만나는 곳>을 비롯하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는 꼭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그 외에도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든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같은 책이 소개되어 있다.

요즘 나는 회사에서 일삼아 매달 패션지 10권쯤은 우습게 훑어보고 있다. 언젠가 케이프타운의 멋진 풍경이 나온 잡지 페이지를 찢어서 파티션에 붙여두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잡지가 바자였던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가끔 잡지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휴가 동안 김경은 간간이 일을 했나보다 짐작해본다. 아무렴, 그냥 1년 꽁으로 놀라고 했겠는가. 그래도 어쨌거나 부럽다. 특히 맨 마지막 문장 '나는 찾았다'에 오면 그 부러움이 도를 넘어선다. 좋겠다, 그런 사람 찾아서! 흑. 

밑줄긋기


55 _ "당신만큼 수트를 멋지게 소화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 비결이 뭔가요?"
       세르지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런 칭찬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비결이라면, 내가 수트를 입는 것이지 수트가 나를 입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145 _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이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사람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존 버거 '여기, 우리는 만나는 곳' 중)

224 _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손짓 발짓과 웃음. 얼굴 표정으로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은 말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걸.

264 _ 한국의 건축가들이 왜 답사여행을 한답시고 루이스 칸이 설계한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이나 르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 같은 곳만 가는지 모르겠다. 아파트나 빌라에서 살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불행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건축가라면 부다페스트의 평범한 주택가를 방문해봐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287 _ 마티스가 죽기 1년 전, 평생 미술을 계속할 수 있게 당신을 이끈 힘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마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순진함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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