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전반의 폰털이 일기 살고

공짜표가 생겨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봤다. 
우리나라 주크 박스 뮤지컬이 안고 있는 고질병을 이 작품 역시도 똑같이 껴안고 있었다. 우리나라 주크 박스 뮤지컬은 짠듯이 헤어진 첫사랑과 불치병, 화염병을 소재로 한다. 풋풋한 첫사랑으로 시작했으나 대학에 들어간 뒤 둘 중 하나(거의 대부분 여자임)가 운동권에 투신하고, 거리에서 한쪽은 경찰, 한쪽은 시위대가 되어 만나고, 그 때문에 비극적으로 헤어지거나 연적(주로 운동권 선배임)에게 여자를 뺏기고,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재회하게 되는데, 그때 둘 중 하나는 꼭 불치병에 걸려 있다.
80년대에 나온 노래들이 주옥 같고, 노래가사가 거의 대부분 사랑이나 청춘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럴 수는 있겠으나...그래, 뭐 동물원이나 김광석의 노래를 그렇게 쓸 수는 있다. 노찾사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니. 하지만 이문세라니!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와...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시위대 BGM으로 까는데, 나 정말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아니고, '붉은 노을'에 그토록 비장하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정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 뮤지컬은 몇가지 다른 장치를 마련해둔다. 하늘에서 내려온 저승사자 군단이라든가 알고보니 이 러브스토리가 상상이었다든가. 하지만 메인플롯은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저승사자 역할을 했던 구원영이 노래를 잘하고, 발랄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날들> 같은 그런 뮤지컬은 더 이상 힘든건가. 90년대 노래 (이를테면 신해철이나 서태지)로 뮤지컬을 만들면 최소한 학생운동 이야기는 안들어갈 수 있으려나.

일산 어딘가에서 주운 도토리. 
10월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집들이를 하지도 않았는데) 이사 선물이라며 이 컵을 줬다.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커피 페어에 갔다가 보고 사고 싶어서 몇번을 들었다놨다 했다가 안산 컵인데,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더니 그걸 보고 직접 주문해서 받아온 것이다. 너무 얼떨떨해서 고맙다는 얘기도 제대로 못했다. 소인아, 잘 쓰고 있어. 고마워!! ^^
어느 아침에 커피 마시다가, 왼쪽 파란컵에는 커피가 흘러 지평선 부근에 얼룩이 졌고, 오른쪽 분홍컵은 설거지하다 기스난 건지 연필로 그은 것 같은 비스듬한 선이 생겼는데, 그게 어쩐지 회오리 바람처럼 보여서 사진 찍어봤다. ㅎㅎ 유약을 멋지게 칠해서 그냥 봐도 마른 땅과 하늘의 조화가 자연스러운데, 커피 얼룩이나 연필 선이 생겨도 자연스러워서 더 좋다.
고려대 한국학관에 강의를 들으려고 찾아갔는데, 식겁했다. 카카오맵에 제대로 한국학관이라고 찍어서 갔어야했는데, 어차피 고려대 안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고려대만 찍고 갔다. 그리고 고려대 캠퍼스 사이를 걸어다니며 30분을 헤맸다고 한다. ㅠ.ㅠ 고려대가 3개의 캠퍼스로 나뉘어 있고, 그 사잇길들이 차도인데다, 어마어마한 오르막+산길이라는 걸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ㅠ.ㅠ 자연대 캠퍼스 대신 인문대 캠퍼스에서 출발한 걸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본관 뒤는 포크레인으로 공사중이라 길이 있나 없나 망설이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었더니 길이 있다고 해서 갔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 옆을 걸어가며 길을 잘못 들었나 했지만, 간간이 학생들이 내려오고 있어 믿고 갔더니, 기숙사였다. 거기서 또 한번 길을 물어(신입생은 한국학관이 어딘지도 모르더라)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차도 옆을 10분쯤 더 걸어야했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여행 갔다가 버스기사랑 말이 안통해서 동물원 바로 옆 하이웨이에 내린 적이 있는데, 꼭 그때 같은 막막함이 몰려왔다. 난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이렇게 가서 엉뚱한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는 건 아닌가? 윗 사진의 왼쪽 낙엽 깔린 길을 걸어가는 내내 열번쯤 했던 생각이다. 저 녹색 마을버스 타고 고려대 아이스링크 정류장에 내리면 금방인데, 그걸 모르고 30분을 헤맸네. 강의실에 도착해서 앉으니 등 뒤로 땀이 주루룩 떨어졌다. 내가 경험해본 캠퍼스 중 제일 척박했다.
요즘 KBS드라마 <최고의 이혼>을 보면 청계천(이지 싶은) 징검다리가 자주 나온다. 주인공들이 그 징검다리에서 자주 만나는데, 서울에서도 저런 뷰가 가능하군 하면서 본다. 면접을 망치고 돌아오던 어느 우울한 날, 청계천은 아니지만 어느 천변에 저런 징검다리가 보여서 찍어봤다. 마침 해도 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홍제천, 우이천, 양재천...서울에도 천이 많구나. 
드디어 가보게 된 마포중앙도서관.
마당에 이런 멋진 조각이 서 있더군. 그러나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다. 강의들으러 간 거라 자료실 층에는 서지도 못하고 엘리베이터타고 윗층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우리집에선 6호선이든 버스든 접근성이 좋으니 한가할 때 다시 한번 놀러가서 제대로 둘러봐야지.
자료실 못보고 올라가서 장강명 작가의 강의를 들었다.^^
마포중앙도서관 개관 1주년 행사라고 한다. 비니를 쓰고 오신 작가님은 목소리가 굉장히 좋았다. 읽고 쓰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내가 바로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라며 으쓱으쓱. <로리타> 읽어본 사람 손들라고 해서 쭈볏쭈볏 손들고 또 헤벌쭉. ㅋㅋㅋ
지금 굉장히 하드한 범죄소설을 쓰고 있대서 기대 중. 언론사 내부 이야기도 나중에 쓸 수 있다면 쓰겠다고 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건 신나는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김영하 작가님. 작품 안쓰십니까? 알쓸신잡도 좋지만 소설 좀....
기승전김영하로 마무리하는 일기 끝!



낯선 시선 읽고

낯선 시선
정희진 | 교양인

여성학자 정희진이 한겨레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한겨레 칼럼 중 정희진의 칼럼에는 유독 악플이 많이 달렸는데, 나는 정희진의 글에 시원함을 느끼거나 새로운 발견이 많았기에 이런 글이 왜 비난받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책은 '상식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부끄러움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로 나뉘는데, 날짜별로 대충 제목만 달아둔 게 아니라 진짜 그 주제에 맞게 분류해놓은지라 '고통에 대하여' 부분을 읽을 때는 고통스러웠고, '남성에 대하여'를 읽을 때는 한숨이 나왔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박근혜 누드풍자화 '더러운 잠'이 표현의 자유냐 여성혐오냐를 두고 논쟁을 했었는데, 그에 대해 확실하게 나와 있어 배웠고, 마지막 KTX가 전라도를 차별하는 바람에 지역 상권이 죽지 않았다는 메일을 받은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정희진의 책을 읽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밑줄긋기로 감상을 대신한다. 

밑줄긋기
15 _ 페미니즘의 주장은 언제나 '차이가 차별이 된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차이와 차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17 _ 단언컨대, 여성주의를 모르고 앎을 말할 수 없다. 인류의 반의 경험을 제외하고, 어떻게 인간과 사회를 논하겠는가.
34 _ 자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자료는 객관적이고, 사람의 경험이나 말은 임의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45 _ 정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공유하는 일이다.
47 _ 가정 폭력 상담을 하다 보면 남성은 열 대를 때려야 폭력 남편으로 인식되는데, 여성의 정당방위는 단 한 대도 폭력으로 간주된다.
51 _ 20:80의 양극화 사회라고 전율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세계화. 지금은 99.9 : 0.1의 사회다. 0.1퍼센터의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가시권에서 사라졌다. 투쟁의 대상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힐링이니 자기 계발이니 하며 자신과 싸우고 있다.
62 _ 가족 이기주의란 사회의 기본 단위를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상정하여, 계층 상승 욕구를 가족애로 둔갑시키는 간교한 장치다. 
76 _ 우리의 바람과 달리 취향과 올바름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정치 구조적 문제를 취향으로 포장할 자원이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84 _ 다른 사회 운동에 대입해봐도 '남혐'은 어불성설이다. 구의역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애도가 서울시(민)에 대한 혐오인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비장애인에 대한 혐오인가? 동성애자들의 인권 운동이 이성애자에 대한 혐오인가?
91 _ 인간관계에서 불성실과 딴청처럼 효과적인 억압은 없다. 상대가 스스로 미치기 때문이다.
94 _ 자유, 평화, 인권은 약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이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일 때 권리들 사이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94 _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몸 상태가 다른 노숙인 같은 소수자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155 _ 정치는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책임이고 선거는 그 대리인을 뽑는 첫 과정이다. 우리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대표자가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 즉 자신이 욕망하는 인물에게 표를 준다. 권리를 반납하고 자신을 지배자와 동일시하는 이른바 '대중 독재'다. 대중의 선망을 받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독재자보다 더 잔인한 면이 있다. 부도덕하고 무능한데도 단지 유명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랑받는다면? 그런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잘해줄 이유가 있을까.
164 _ 몸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더 좋아한다. 익숙함은 인간사의 대표적 부정의다. 
177 _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지, 출세까지 해야 되나.
224 _ 마음이라는 신체 부위는 없다.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픈 병이다. 우울증은 기분, 인식, 판단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 아픈 병이다.
226 _ 자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고통에 대한 몸의 면역력이지, 개인의 나약함이나 사회적 억압 자체가 아니다.
232 _ 그러나 회피는 결국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253 _ 상대방이 '자기 여자'의 누드화를 제작하고 전시해서 모욕감을 느꼈다면, 남성들끼리 벗기면 된다. 왜 '상대방의 여성'을 벗기는가.
256 _ 유부남의 혼외 성애는 두 여성의 사랑을 받지만, 유부녀는 두 남성에게 노동하는 경우가 많다.
266 _ 남성과 남성이 갈등하면 대리와 과장의 싸움이 되지만, 여성 상사와 여성 부하의 갈등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남자의 적도 남자다. 남성들의 투쟁은 여성의 그것보다 더 격렬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노사 갈등'이거나 '국제 정치'지, 같은 성별 간의 질투로 비해되지 않는다. 
268 _ 대개 서명 운동은 진상 규명이나 피해 보상 등을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 일부 기독교 세력의 동성애 반대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것인가, 동성애자인 '사람'을 반대한다는 것인가? 이상한 캠페인이다. 마치 장애를 반대한다, 장애인을 반대한다, 검은색을 반대한다, 흑인을 반대한다는 것처럼 시비를 떠나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78 _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278 _ 여성의 사회 진출만큼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여성 '지위 상승'은 여성의 이중 노동일 가능성이 크다. 
282 _ '술을 마셔서 때리는'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다'가 더 정확하다.
286 _ 우리 사회는 억압받는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지위가 높은 명망가가 명분상 그들을 대의하는 방식을 좋아하고, 대중은 명망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11월 단풍 살고

늦가을, 시도때도 없이 폰카를 들이대 찍은 단풍 사진들 방출.
 
어떻게 하면 하늘과 노란 은행잎이 같이 잘 찍힐 수 있을까 하며 이리저리 설정 조절하다 
운좋게 하나 얻어걸린 왼쪽 사진. 보통은 오른쪽 사진처럼 찍힘. 하늘이 쨍하면 나뭇잎은 컴컴.
그러나 때로 설정하지 않아도 이렇게 노란색은 찍힌다. 물론 쌩눈으로 보는 게 훨씬 더 노랗고 예쁘지.
여기까지는 집으로 오는 길 상수역과 광흥창 사이에서 본 나무들.
일산 부자동네의 어느 집 앞에 서있던, 동그랗게 머리깎은 단풍나무.
해가 넘어갈 즈음, 잎이 다 떨어진 플라타너스와 하늘.
파주 책의 숲 창 너머로 펼쳐지던 풍경.
마치 물 같지만 책상 표면임. ㅋㅋ
책장과 책상 너머로 펼쳐진 파주 풍경.
여기까지는 일산과 파주에서 찍은 사진.

 
초절정을 넘어 슬슬 헐벗는 단계로 가고 있는 국회도서관 앞 단풍나무들.
이제 나뭇가지에 달린 것보다 땅바닥이 더 울긋불긋하다.
그 마저도 몇주 지나면 없어지고 말겠지.


(11월 단풍과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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