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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한겨레출판

장강명의 거의 모든 소설을 다 읽고 이제서야 <표백>을 읽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나는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읽으면서 장강명이 한 세대를 관찰하고 위로하고 이름붙인 작가구나 생각했는데, <표백>을 읽어보니 그는 시작부터 그런 작가였구나 싶다. 한때 신문기사들에서 '표백세대'라는 말이 잠시 유행했었는데, 그 말이 왜 나왔고, 왜 그토록 유통기한이 짦았는지도 이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5년 전 대학동창 세연이 죽었다. 학교 교정의 얕은 시멘트 연못에 빠져 죽어 실족사로 결론이 났지만, 세연과 어울리던 무리들은 그게 자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늦게 태어난 비운의 천재 같았던 세연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자살만이 이 완전한 세상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득한다. 자신이 자살하고 난 뒤 니들도 자살하라는 세연의 제안에 치기로 찬성한 친구들. 그러나 그들도 나이를 먹어 세연이 죽고 5년이 지나는 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해서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5년 후 진호그룹의 장남 선우가 미국에서 죽는다. 처음엔 살해사건인 줄 알았으나 그 역시 자살이었고, 이와 동시에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가 생긴다. 사이트에는 세연이 썼던 자살선언문이 올라오고, 사람들에게 자살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된 작가의 초창기 소설을 나중에 읽었을 때 가장 흐뭇한 케이스는 그 소설이 나중에 나온 작품들보다 못했을 때다. 그러면 그 작가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뜻이고, 나는 앞으로 나올 그 작가의 작품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첫 작품이 너무 좋아 그의 팬이 되었는데 이후 나오는 작품이 첫 작품에 미치지 못하는 케이스보다 훨씬 고무적이다. <표백>도 그랬다. 이제껏 내가 읽었던 장강명의 소설 중 가장 치기어리고 별로인데, 그래서 좋았다.
이 소설이 나올 당시에는 센세이셔널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무엇을 해도 역사나 사회에 이름을 남길 수 없고, 변혁할 수 없는 세대. 그 절망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읽으면서 점점 세연의 설득에 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찝찝했는데, 적그리스도가 결국 그 부분을 발견해낸다. 세상을 변혁했다는 전 세대들도 혼자서 뭔가를 이뤄낸 건 아니며, 화염병을 한번 들어봤다거나 새로운 노래를 듣고 좋아했다는 식의 개별적 경험으로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 책 읽고 나니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읽고 싶어졌다.


밑줄긋기
17 _ 대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은 자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놈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의를 보호하려 하지. 순환논법이야.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그 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사람은 예술의 개념을 바꿨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104 _ 이것이 테러범들이 그토록 유리한 이유다. 어떤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쉽다. 아주 작은 균열, 아주 작은 실패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144 _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그 동기가 그저 순수하기만 했을까, 아무런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죄와 벌>을 썼다고 해서 그 책의 가치가 달라져?"
149 _ 왜 홍콩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황산 테러가 계속 이어지는가? 왜 중국에서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흉기 난동이 유행하고 있는가? 왜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사고가 자주 벌어지는가? 
그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절반짜리다. 병적인 행동의 양상이 지역마다 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전부 다 병들었다. 진짜 답변은 우리가 일탈 행위를 할 때 그다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일탈할 때조차 정말 독특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데 있다.
197 _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214 _ 공무원들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급 공무원들도 그랬고, 국/과장들도 똑같았다. 황당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차관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주가 있는 국/과장들이 능력 있는 상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289 _ 자살 선언은 통계나 숫자 하나 없이 직관과 단정으로 가득했으며, 그래서 더 반박하기 힘들었다.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산문시를 두고 입증되지 않은 논리라든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략) 이 선언에 맞서려면 이 선언과 같은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반박 논리를 펼쳐야 한다. 곳곳의 빈틈을 공격해봐야 핵심을 놓친 트집 잡기처럼 보일 뿐인데, 그게 여러 언론사의 논설위원들이 저지르는 오류였다.
335 _ 그녀는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경치 때문에 산을 좋아했다.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멀리서 내려다보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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