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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읽고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김건우 | 느티나무책방

이 책도 페이스북에서 꽤나 회자되던 책이다. 페북 추천책들이 복불복이라 좀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갖다줘야지 했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울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술술 읽힐뿐만 아니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 어쩌면 올해의 책일지도!
이 책이 마음에 든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봤다.

첫째, 이 책의 프레임이 마음에 든다.
부제가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이라 되어있고, 제목도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라서 꼴통 보수 우익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그렇다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자들의 면면을 좀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들었는데, 의외로 장준하, 김교신, 함석헌, 김수환, 한신과 오산학교 등 흔히 좌파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이렇게 써놓았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에서 좌익이 정권을 잡은 적은 없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근대화의 플랜을 제시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장준하와 김준엽 등 <사상계> 그룹의 성향은 명백히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 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 우익 일부에서 틀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하! 이거였구나. 보수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꼴보수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장준하를 비롯한 1960년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그런 우익의 가치 아래 이 나라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들이 저항했던 것은 우익이 아니라 독재였다. 항상 갇혀 있던 프레임을 깨고 학술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우익을 증명하는 쾌감이 있는 책이다.

둘째, 한번씩 이름을 들어봤을뿐 제대로 몰랐던 1950~1970년대를 관통하는 사상계, 정치계, 언론계, 문학계의 거물들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되어 좋았다. 박정희 정권에 죽임을 당했지만 장준하는 5.16을 환영했었다는 사실, 교수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사회기본틀을 구상하는 전통이 박정희 때 만들어졌다는 사실, 1950년대부터 우리는 덴마크식 사회 모델을 지향해왔다는 사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않고 이북 출신이라면 감쌌던 선우휘, 예수와 노장사상을 버무린 함석헌의 씨알, 카톨릭을 통해 엄청난 지원을 해준 독일 교단, 민족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편에서도 혼란하게 이용되는 현실, 지사적이고 꼿꼿한 조지훈과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던 김수영, 조동일이 한국문학통사에서 왜 그런 말도 안되는 긴 이행기를 잡았는지의 이유 등등.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고 꼼꼼하게 소개된다.
그 사이사이에 어린시절 읽었던 계몽사 대백과사전에 나왔던 김활란, 최근 남도학숙 취재갔다 알게된 새마을 운동의 효시 김준, 작년에 인상깊게 읽었던 리영희 등의 이름을 찾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한 책은 아니다. 한국을 설계했다는 이 사람들이 대거 학연과 지연에 묶여있다는 점, 지금의 한국과 똑같이 몇 기수 위냐 아래냐에 따라 운명이 갈라졌다는 점(학병세대라는 것은 1917년을 기점으로 일제에 정신적 빚이 없는 세대를 일컫는다), 그 안에 여자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는 점 등은 한계로 지적될만 하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한국 사상사의 한계이기도 하니 이 책의 문제라고 지적할 일은 아니다.  
저자가 국문학 전공자라 조지훈과 김수영, 조동일, 김윤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좋았다.
전체 내용이 다 마음에 들었지만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김수영의 글 한구절을 적어둔다.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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