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훔친 미술 읽고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 민음사

오랜만에 이렇게 두꺼운 미술책을 읽었다. 이 책은 세계사를 미술작품과 엮은 책이다. 세계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화가의 그림으로 보여주며 설명한다. 세계사 책으로 봐도 무방하고 미술사 책으로 봐도 괜찮다. 무지 두꺼워서 오래 읽어야 되지 않을까 했는데, 재밌어서 금방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서양사에서 항상 궁금했던 몇가지 의문점이 풀렸다.
중세 암흑기가 지나고 르네상스가 꽃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히 거기서 더 발전된 형태의 미술이 나와야 되는데, 그 뒤에 엉뚱하게 신고전주의니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면서 오히려 중세로 돌아간 듯한 미술흐름이 왔다. 이 책의 설명을 보니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개신교가 득세하자 위기감을 느낀 카톨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흐름에 따라 바로크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로마 교황청에 가면 각종 조각들이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처럼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리스 신은 기독교에서 보면 이단 아닌가? (그리스는 다신교, 기독교는 일신교) 왜 둘이 비슷하지? 항상 그게 궁금했는데 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알려준다. 
르네상스 덕분에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 로마 조각들이 완성형의 신체를 표현하므로, 예를 들어 다비드(돌팔매로 삼손을 무찔렀던 그 소년 다윗 말이다) 상 같은 경우 완벽한 비례의 그리스 조각을 본딴 것이다. 이를 통해 교황청의 권위를 옛 로마의 영광과 연관시키려는 의도. 그러니까 형식을 따와 아우라를 풍기려는 의도였다. 앗항 그런 것이었군!
로마의 영광을 가져오려고 노력한 것은 교황청 뿐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시민들이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인데,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자신이 부르봉 왕가의 핏줄이 아니니까 자신의 황제됨을 로마에서 가져왔다. 로마 황제는 핏줄이 아니라 원로원의 선출로 뽑혔으니까. 그래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라든가 그림들이 로마시대를 흉내냈던 것이다. 나폴레옹도 민주주의의 시계를 후퇴시켰지만, 나폴레옹 3세도 장난 아니었다. 대를 이어 어찌 그런지... 나폴레옹 가에게 당한 프랑스 국민들은 박정희 가에 당한 한국 국민들을 연상시켰다. 우리만 민주주의가 갈팡질팡 퇴보한 게 아니라 프랑스도 스페인도 다 그랬다.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이 왜 이런가, 인간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한숨이 나온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도 궁금했는데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라 자유 진영에서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해 시민군들을 도와주지도 않고 프랑코를 못 본척 했고, 그 틈을 타 히틀러와 프랑코가 손을 잡고 국민들을 학살했다. 이념의 대립인데다 내전이라 6.25와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우리는 100퍼 대리전이긴 했지만, 극우든 극좌든 '극'끼리는 통하는 것 같아 나에게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래서 스페인에 뭔가 모를 애착을 느꼈나 싶기도. 
스페인 여행을 다녀오고 스페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스페인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쓴 작가는 스페인을 무척 싫어하는 듯 했다. 제국주의의 원흉인데다 종교로 탄압을 하고 나중에 스페인 내전까지 일으키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페인 지배층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터키 쪽도 보고 싶었는데 몇줄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1400년부터 시작된 소빙하기 및 페스트로 유럽 인구가 줄어든 덕분에 농노에서 임금 노동자로 전환이 되었고, 인상주의자들이 밖에 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튜브형 물감이 발명되었기 때문이고, 고갱이 타히티 사람들을 무뚝뚝하게 그린 이유는 자신과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하여간 융통성 없고 마음에 안들어, 고갱)이라는 소소한 정보들도 알게 되었다. 
'나쁜 여자 전성시대'라고 해서 서양화의 모델이었던 여성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변천하는 과정도 나오는데, 요즘의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면 너무 보수적으로 쓴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다 보면 같은 시대의 화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카라바조 시대에 유독 검은 바탕의 그림이 많았다거나 이 책에도 나오듯 고야의 처형 그림 구도를 마네가 베꼈다거나. 내 눈에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침몰'과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무척 비슷해 보인다. 이 책에는 '메두사호의 침몰'이 먼저 실려있는데, 이 그림 보는 순간 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생각났다. 하긴 글도 그런데 그림이라고 안그럴까.
이 책은 세계사를 미술로 풀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만들어졌고, 참고도서 목록만 거의 10p에 달한다. 인용하는 책들 중 읽어본 책이 몇권 있어 다른 책들도 어떻게 인용했을지 감이 잡힌다. 이제껏 한국에 나온 대중미술사 책을 싹 망라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 많은 책 읽지 말고 이거 한권으로 퉁쳐도 될 듯.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쓴 것에 비하면 교정이 엉망이다. 비문과 오탈자가 너무나 많다. 민음사나 되는 출판사가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분노하려다 얼마전 미대 논문 교정하던 생각이 나서 참았다. 원래 원고가 그 미대논문 수준이라면 이게 최선일 수도 있겠다. 내부 사정은 모르는 거니 분노는 그만두고, 하여간 어느 쪽이든 한번만 더 교정했으면 참 좋았을텐데...

밑줄긋기
71 _ 모든 새로운 것은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 줄 새로운 사상을 갈구한다.
72 _ 왕조는 소멸하며 국가는 붕괴한다. 학설은 효력을 상실하며 기관은 영락한다. 그러나 작품은 살아남는다. (데이브 히키)
75 _ 중세 회화를 지배하던 역원근법이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선원근법은 '지금, 여기' 현존하는 주체의 존재를 전제한 방법이다.
194 _ 옛 귀족이나 왕족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좋은 혈통의 애완견이나 말은 함께 등장하는 주인의 뛰어난 혈통을 암시한다.
201 _ 계몽주의가 절대왕정과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귀족들에게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할 자유'였던 것이다. 가문 대 가문의 결합인 정략결혼이 횡행하던 당시에 귀족들에게 신분과 가문을 초월한 사랑,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한 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낭만이었다. 로코코 궁전에서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계몽주의 철학이 논의될 수 있는 이유였다.
329 _ 전통적인 도상을 뒤튼 마네의 작품들은 가혹한 비판에 부딪쳤다. 그러나 마네에게 쏟아졌던 비난은 사실은 삶이 송두리째 변했는데도, 기존의 회화적인 관행에 묶여 있던 고답적인 사람들 무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겨야 했다.
371 _ 어떻게 이미 100만 명이 사는 대륙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가? (딕 그레고리)
425 _ 예술가에게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적 태도다. 그것이 예술을 오래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497 _ 오랜 불황을 겪은 나라들의 탈출구는 전쟁이었다. 죽어 가는 미국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수산업으로 호경기가 찾아올 때까지 실업 문제에 대응할 만한 뾰족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뉴딜 정책이 보인 한계였다. 그래서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미국 경제를 '전쟁 경제'라 주장하기도 한다.
511 _ 유럽 자유주의자와 좌파 운동가 들은 히틀러를 위시한 파시스트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 이후 더 이상 유럽 내에서 공산주의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각자의 관점에서 그들은 각자 전쟁을 치렀다.
543 _ 과거에 대해 눈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노출될 소지가 많다. (바이체커)


덧글

  • 긴호흡 2018/02/13 22:08 # 삭제 답글

    이진숙작가 글 좋더라고요. 저도 간만에 포식하는 느낌이었어요. 도서관서 빌려봤는데 사놓고 수시로 꺼내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위대한 미술책>도 좋았어요. 신뢰할 만한 작가를 하나 찾아서 기뻤어요.
  • 이요 2018/02/14 10:40 #

    저도 맨날 읽던 작가만 읽어서, 오랜만에 새로운 작가 만나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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