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본 영화 읽고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교양인

여성학자 정희진이 혼자서 본 영화들에 대해 쓴 리뷰. 이제 정희진은 웬만큼 읽어봤다 싶은데도, 여전히 그녀의 글에는 밑줄그을 구절이 많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정희진을 읽을 것이고, 계속 새로운 생각들에 밑줄을 그어댈 것이다.
소개된 영화 중에는 본 영화도 있고, 안본 영화도 있고, 봤지만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도 있다. 가족 밖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했다고 말한 <가족의 탄생>의 경우, 나는 왜 항상 남자가 사고친 뒤치닥꺼리를 여자가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굉장히 짜증났던 영화다. 이 책을 읽은 지금도 그닥 그 생각이 달라지진 않았다. 메릴 스트립의 '승자독식' 노래를 찬양한 <맘마미아> 리뷰는 거의 100% 내 마음과 같았다. 나도 그 피 토하는 메릴 스트립의 노래 덕분에 <맘마미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뮤지컬에서 다른 배우가 부른 '위너 테익스 올'을 들으며 이건 아니다 했다. 정희진의 말처럼 그걸 듣는 사람이 겨우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 ㅋㅋㅋ
<겨울연가>와 <외출>의 배용준이 일본 아줌마를 비롯 여성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이제까지 사랑이 여성의 일(=노동)이었으나 배용준이 최초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감정노동을 하며 자신의 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무척 신선했다. 더불어 그들이 부인에게 밥을 먹이거나 남편의 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아주 오래된 제도의 습관을 보고 마음을 돌리는 장면에서 아무것도 아닌 제도와 관습이 열정이나 사랑보다 훨씬 힘이 쎄다는 걸 읽어내는 것도 멋졌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신과 대적하려 했다는 사실, 신이 뭘 하나 줬다고 해서 자신도 신에게 갚겠다는 것은 피조물의 이상한 자아확대라고 당당하게 말해주는 것도 놀라웠다. <강철비> <의형제> <공조> 등 북한관련 첩보물이 남북브로맨스물이며, 거기에 여자가 낄 자리는 없다는 것도 다시 한번 인식했고, <송환>의 감독과 <낮은 목소리>의 감독이 주인공들과 어떤 지점에서 차이를 두고 다른지도 알게 되었다. <박치기!>와 <머니볼>은 꼭 찾아서 보고 싶다.  
<정희진처럼 읽기>가 출간되기 전만해도 교양인(정희진 책들의 출판사)에서 정희진의 다음 책 목록이라고 10권쯤 적어놓은 거 보면서 패기보소 했는데, <혼자서 본 영화>까지 출간된 걸 보니 진짜 그 목록에 있는 책들이 다 출간될 것만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야 고맙지.

밑줄긋기
23 _ 인생에서 "내 일을 했을 뿐"으로 정당화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데, 이런 말은 인간을 혼자 살게 내버려 둔다.
49 _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때 남성은 오히려, 모든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이,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팜파탈은 남성의 욕망을 맘껏 채워주면서도 남성들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남성은 여성에게 무성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면서도, 성적인 문제의 모든 책임은 여성에게 떠넘긴다.
54 _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아예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62 _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65 _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2010년대 여성의 지위는 2010년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되며,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되지 않고 노동 계급 남성과 비교된다.
110 _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118 _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156 _ 전쟁을 원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전쟁과 평화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성폭력 위협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전쟁과 평화의 구분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가채하가 외국 군인일 때만 전쟁 상태로 간주되곤 한다.
184 _ 여성 관객은 능력, 외모, 책임감 등 남성으로서 모든 것을 다 갖춘 북한 남성과의 로맨스를 즐기고, 남성 관객은 북한 남성의 액션을 즐기며, 자본은 '천만 흥행'을 즐긴다. 남한의 영화 산업은 북한 남성을 대상화함으로써 득을 보고 있다.
207 _ 대개 소작인은 지주 보다 마름과 사이가 더 나쁘다. 사람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보다 그들의 '똘마니'들을 더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부하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독재자를 불쌍히 여긴다. '진짜 권력'은 잘 보이지 않는 데 비해, 마름이나 '똘마니'의 권력과 횡포는 매우 가시적이고 '지주'보다 '똘마니'가 덤벼볼 만하기 때문이다.
216 _ 우리는 흔히 '차이가 차별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차이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먼저 온다. 불평등이 있기 때문에 차이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권력이, 인간들 사이에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혹은 의미 없는 차이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흑인 노예가 필요하기 전까지는 인간의 피부색이 문제되지 않았다.
220 _ 여성은 힘이 없기 때문에 (남성)권력화 된다. 여성이 진짜 권력이 있다면, 반대로 권력이 여성화될 것이다.
224 _ 하지만 평화는 흔히 생각하듯 갈등과 고통 없는 상태가 아니다. 만일 평화를 '도 닦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평화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평화는 폭력 대신 대화, 말의 정치를 선택하는 것인데, 소통은 언제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든 대화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변화를 위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격렬한(폭력적인)' 것이다. 평화는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을 '정리(=변화의 중단)'하지 않고 견디는 힘이며, 중단 없는 치열한 저항을 뜻한다.
231 _ 사람들은 지배적 논리에 익숙해서 그 논리가 계속 틀리더라도 흔들리지 않지만,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비판하고 조롱한다.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시행착오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의 실수를 자신이 옳다는 증거로 삼는다. 


덧글

  • augenauf 2018/05/07 06:54 # 삭제 답글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이 말이 어느 영화를 언급하면서 나온 건가요? 궁금하네요.
  • 이요 2018/05/07 09:24 #

    <밀양>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 구절 뒤로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라고 이어집니다.
댓글 입력 영역


2017 대표이글루_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