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야행과 비오는 종묘 (부제 : 6천보의 나날들) 살고

예기치 않게, 혹은 본의 아니게 깁스를 푼 후 많이 걸어다니고 있다. 초반 하루이틀은 집 앞 병원가서 물리치료 받는 거 외에는 집 안에 있어서 1천보도 안되게 걸었는데, 이후 집을 알아보러 다닌다거나 두달 만에 강의를 재개한다거나, 회의를 하러 강북삼성병원 뒷동산을 박박 기어 올라갔다 오며 하루에 4천보, 6천보, 드디어 7천보까지 걸었다. 
서울자유시민대학 본관에서 회의한 날. 
아치형 창밖으로  5월의 녹음이 푸르러 좋았다.
두달만에 만난 주임님은 깁스 푼 기념으로 앙증맞은 머랭쿠키를 주셨고, 
작년 1년간 만들었던 웹진 다들의 무크지도 나와서 얻어왔다.
그리고 역사박물관 앞에서 친구를 만나 정동길로 넘어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동야행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먼 거리를 처음 나간 날이라 초속 1cm 정도의 느린 걸음으로 절룩절룩.
하지만 끝까지 걸었다. 막 불이 켜지던 시점이라 전등이 예뻤다.
덕수궁 근처로 오니 가장행렬을 하고 있었다!!! 이 몇십년 만의 가장행렬이란 말인가!
악대부가 앞에서 금관악기들을 불며 지나가고, 그 뒤로 개화기 서양복장의 외국인들, 
개화기 여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들이 가장을 하고 쭉 지나갔다.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본 거 아닌가 싶은 재밌는 광경.

그렇게 예기치 않게 6천보 넘게 걸으면서 정동야행의 시작을 구경한 게 금요일 저녁, 그 다음날인 토요일은 아침부터(실은 밤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는데, 창덕궁과 종묘 사이 순라길에서 독서모임이 있었다. 홍대 앞에서만 해도 안갔을지 모르겠는데, 비오는 종로라니까 또 나가고 싶어져서 부랴부랴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우중에 연등행사가 있어 종로쪽으로는 버스고 택시고 못간다는 게 아닌가? 덕분에 갈아타지도 않고 창덕궁 앞에 내려서 모임에 갔다. 모임 후 점심을 먹은 뒤 비오는 종묘에 갔다. 건축가들, 인문학 서적에서 장대비가 퍼붓는 날 종묘를 가야 진짜 장관을 볼 수 있다고 누누이 들어왔고, 폭우 쏟아지는 날 꼭 종묘에 가자고 친구들과 약속도 했는데, 한 여름도 아니고 5월에 가게 되었다.
입장료는 내가 쏜다며 호기롭게 5만원 짜리를 꺼낸 게 무색하게, 7명 입장료가 단돈 3500원! 원래 성인 1000원인데 무슨 할인이라며 500원에 티켓을 줬다. 평일에는 가이드를 따라 입장해야 되지만, 토요일은 자유관람일이라 우리끼리 보며 돌아다니면 된다. 
종묘 정전에서 보는 빗줄기들
젖은 박석.
그러나 아쉽게도 물이 콸콸 흘러넘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보려면 슬리퍼 신고 폭우주의보 내렸을 때 가봐야할 것 같다.
폰카가 꼬지지만 빗줄기를 잡아보고 싶었다.
정전 처마 밑에 서서 여기 왔다 갔다는 인증샷. ^^
악공청에 앉아 전설의 고향 느낌 한번 내봤다. ㅎㅎㅎ
악공청에서 내다본 푸름
악공청에서 찍으면 이렇게 담너머 정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오는 종묘는 관과 임금이 드나들던 신로의 돌로 만든 보도 외에는 온통 진흙밭이다.
정전 쪽은 모래가 깔려 물이 잘 빠지지만, 입구 쪽은 완전 뻘밭.
신발도 젖고, 운동화에 진흙 묻으면서, 과연 조선시대 궁에 살던 사람들은 
비오는 날 얼마나 움직이기 힘들었을까 싶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좋은 걸 남들도 아는지, 그 우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발이 나으면 한번 더 폭우 쏟아지는 평일에 가보고 싶다. 
이날은 7288보 걸었다. 


덧글

  • augenauf 2018/05/14 07:13 # 삭제 답글

    1991년. 언제였는지 잊어버릴 수도 없는 여름 비오는 날. 종묘에 있었습니다.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지요. 저와 친구밖에 없었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비오는 날 종묘가 이렇게 아름다운 걸 사람들이 모르는구나.
    그런데 누군가가 그 아름다움에 대해 썼더군요.
    그 후론 비오는 날 종묘가 북적이는 듯.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비오는 날 산책했던 그 기억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
  • 이요 2018/05/14 09:12 #

    으아...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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