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읽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 문학동네 

2015년에 산 시집을 이제야 읽었다. 박준 시인의 북토크에 진행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허겁지겁 시집을 읽으며 인터뷰들을 찾아보고, 내가 써놓은 에세이 리뷰를 찾아보고 하다가 흐뭇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연수의 에세이를 읽다 박준 시인을 알게 되었고, 시가 마음에 들어 시집을 읽어보려고 찾아보기까지 했더라, 내가. 그때가 무려 2011년. 아직 시집이 나오기 전이었다.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좋은 시인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에 뿌듯해하다가, 그렇게 기다린 시인의 시집을 사놓고 3년간 처박아두다니...이건 뭐냐 싶은....^^;;;
읽어보니 역시 좋았다. TV방송에 소개되어 10만부 이상 팔린 걸로 아는데 방송에 소개된 건 운이었다 치더라도 저력이 있는 시였다. 
나도 실은 방송을 보고 샀는데, 사서 휙 들춰볼 때 '낙(落)'이라는 시를 봤고, 그 단 한편으로 이 사람 너무 잘 쓰는구나 싶었다. 이번에 다시 읽어봐도 역시 그 시가 가장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그 외에도 첫 시 '인천 반달', '그때'라는 부제를 붙여도 될 '동지', 군인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별의 평야', 남해 어느 식당의 추억 '낙서', 이제는 없는 미용실 누나 '미인의 발' 등이 좋았다. 그것들은 따로 내 시 노트에 베껴줄 참이고, 나머지 이 시집에서 좋았던 구절을 두서 없이 나열해 본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김병장님 그런데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이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한 이삼 일 기대어 있기에는 슬픈 일들이 제일이었다 어렵게 찾은 지물포에서 나는 자투리 벽지를 찾는 일로 미안했고 주인은 돈을 받는 일로 미안해했습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는 허수경 시인의 해제가 붙어있는데, 서정(Lyric)이라는 말의 어원이 리라에서 나왔고, 리라는 양의 내장을 길게 자른 줄로 만든 악기라고 한다. '양의 내장을 잘 씻어서 산에 담갔다가 재로 씻어서는 길쭉하게 잘랐다. 그것을 말렸다가 유황에 넣어 표백했다고 한다. 산과 재와 유황이라는 극안한 지옥과, 시간이라는 무표정한 얼굴을 통과한 짐승의 내장을 쓰다듬을 때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그것을 우리가 '서정'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영혼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박준이 쓰는 시들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금 넓어진다'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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