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의 폰털이 일기 살고

에어컨을 들였다. 내 인생 최초의 에어컨이다.
그간 대구에 살면서도, 옥탑에 살면서도 선풍기로 여름을 났다. 친구 하나는 "이렇게 여름마다 정신 못 차릴 거면 에어컨을 들이고 생산성을 높여보는 게 어때?"라 했고, 동생은 내가 전기세 아까워 에어컨 설치를 안하는줄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토록 여름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면서도 에어컨을 달지 않은 건 오존층이 뚫린다는데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아서였다. 매해 여름마다 혀를 쑥 빼물고 "북극곰 살리려다 내가 죽겠네" 소리를 달고 다녔는데, 이전 40여년 간 내가 살린 북극곰이 그래도 반마리는 될 거라 자위하며 과감하게 결단했다. 39만원에 설치비까지 포함되어 매우 싸게 했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설치하러 오신 기사분은 베란다에 실외기를 놓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결국 13만원을 더 들여 실외기 프레임을 외벽에 설치했다. 50만원 이상 든 셈.
태어나 한번도 에어컨 설치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무작위로 벽을 뚫을 줄은 예상 못했다. 베란다까지 두 군데 벽을 뚫는데, 소리며 먼지며 장난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비닐 가져와서 쓰레기 다 치워가고, 청소기로 먼지 빨아들이는 걸 보면서 진짜 우리나라 사람들 일 잘한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했다. '이런 번거로운 과정 때문에 에어컨 안들이려고 했는데..이제 이사하면 이전 설치는 또 어떻게 하나' 싶었으나, 1시간쯤 지나고 공사가 끝나고 청소 싹 다 하고 에어컨 틀었더니...천국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생각보다 자주 에어컨을 틀게 되지는 않는다. 비오고 바람 불지 않는 습한 날 '나 제습기능 있는 여자야'하면서 한번씩 에어컨을 튼다. 뭐니뭐니해도 에어컨이 있어 가장 좋을 때는 화장할 때. 예전에는 화장하면 땀이 나는데다, 선풍기 바람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어서 무척 괴로웠다. 에어컨으로 땀과 머리카락, 두 가지를 함께 잡으니 참 좋다. 

요즘 잘 보고 있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으로 <밥블레스유>가 있다. 이제껏 먹방을 독식해왔던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 모여서 먹고 놀고 이야기하며 밥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기까지 하니 이 아니 좋을쏘냐. 오래오래 장수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자들이라면 그런 먹는 수다모임이 한둘은 있지 않나? 나도 있다. ㅎㅎㅎ그리고 그 멤버들이 모여 우리집들이를 했다. 나는 최화정 같은 언니가 아닌고로 모든 음식은 집 근처에서 공수해왔다. 달콤한 맛과 매콤한 맛이 어우러지는 가마로 닭강정(일주일에 두어번씩 먹다 보니 물리기 시작), t떡이라 줄여부르는 티라노 떡볶이의 떡꼬치(여긴 항상 줄이 긴데, 주인장님 장인 정신이 있어 순서별로 차근차근 혼자 다 소화하심. 덕분에 20분 줄서서 떡꼬치 4개 사옴), 몇년 전부터 서강대교 걸어건널 때 선물처럼 스스로에게 사주었던 왕만두, 반찬집의 따끈따끈한 오징어해물전, 그리고 캄보디아 다녀온 동생의 건망고까지. 송은이는 "하느님이 모든 집에 거하지 못해 엄마를 보내셨다면, 우리에겐 최화정을 보내셨다"고 했다. 그 장면을 보고 해리는 "밥블레스유 멤버들에게 최화정이 있다면, 폭식로드에는 하수진이 있다"고 바로 패러디했다. ㅋㅋㅋ 언니가 요리할 수 있는 부엌(+튀김기)이 빨리 마련되어야 할텐데...쿨럭.

그리고 또 한번의 집들이가 있었다.
그냥 밖에서 밥 먹고, 집에 들어와서 간단하게 캔맥주나 마실까 했는데, 비가 미친듯이 쏟아져서 밖에 나가 돌아다니느니 그냥 집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날 맥주를 마시고 탈이 나서 더는 맥주를 마시기도 싫었다. 그리하여 나는 야심차게 명란 스파게티를 만들겠다 선포했고, 맥주 대신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잠깐 비가 그친 틈을 타 집 앞 마트에 봐둔 와인을 사러 나갔더니...OTL 그 와인은 마주앙이었다...게다가 우리집엔 아직 뜯지도 않은 2100원짜리 진로포도주도 있었다.... 와인을 사지 못한채 들어와 밖에 나가 있는 남친에게 사들고 오라 시켰다. 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내가 띄엄띄엄 와인과 닭강정과 주스를 톡으로 주문하자 남친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매고, 우산에, 와인에, 닭강정에, 주스를 들고 와서 폭발했다. 음식을 내팽개치고 자기는 집에 가겠다고 패악을 부리지(지금까지 그 여파가...--;;), 삶아놓은 스파게티면은 붙고 굳어지지, 음식을 내놨는데 다들 먹느라 힘겹지. 그니까 <밥블레스유> 같은 초대는 음식 솜씨 좋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러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냥 중국음식이나 시켜먹을 걸 싶었던 그 밤에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향초. 작년 송년회 때 득템한 후 처음 켜봤는데 예쁘네.

요즘 잘 보고 있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으로 <백종원의 골목식당>도 있다. ㅋㅋ 그 중에서도 뚝섬 4인방의 솜씨와 고집을 보고 있노라면 "와..." 소리 밖에 안나온다. 너무나 기본기가 안되어 있으면서 음식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 더더욱 절감하게 된다. 최근 가본 어떤 카페도 인스타용으로 굉장히 잘 꾸며져 있고, 분위기도 아늑하고 괜찮아서 들어갔었다. 길가의 칠판에 팥빙수가 있다고 적혀 있어 팥빙수 먹으러 들어간 거였는데, 작고 소박한 꾸밈새와 달리 팥빙수 한 그릇에 18000원이었다. 우와.....@.@ 내가 주문했더라면 바로 돌아나갔을텐데, 다 먹고 난 뒤에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봐도 18000원짜리는 아니었다. 맛도, 양도, 정성도. 8천원이나 한다면 괜찮았을까?
그런데 요즘 식물에 꽂혀있는 남친 왈, 이 곳의 식물들이 다 조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지나가며 보기에는 좋아보여도 막상 들어와보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없어서 손님들이 자꾸 나가는 거라고 했다. 우리가 있는 동안 3~4팀의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다 나갔다. 나는 그 이유가 비싼 팥빙수 때문이랬고, 남친은 저 꽃과 식물이 살아있었다면 그들이 나가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장사를 한다면서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순 자기들 입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자신들의 인건비, 재료비, 임대료를 따져 1만8천원이면 비싼 가격은 아니야 했겠지만, 아니요, 그것은 비싼 가격입니다. 그런 형편없는 빙수를 그 가격에 먹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조화와 생화를 알아보는 예민한 눈들도 도처에 있고요. 마찬가지로 전자렌지에 돌려주는 고등어구이, 가시 안발라진 장어구이, 덜 익은 치킨 스테이크 따위를 돈 받고 팔 생각을 하시면 아니되지요.
나는 최소한 나처럼 요리를 못하면 돈받고 밥을 팔면 안된다는 상식은 있다. 그러나 요즘 자주 식당에서 내가 한 밥 같거나 그 보다 못한 밥을 먹게 된다. 괴롭다. 

푸른 하늘이 얼마만이냐 싶어 마을버스 기다리다 찍어본 하늘.
이 날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다. 인스타며 페북이며 하루종일 하늘 사진들이 쏟아졌다.
하...옛날에는 하늘이 푸른 게 정상이었는데. 여름에 하늘 파랗다고 사진 찍거나 좋아하는 사람 드물었는데.... 어쩌다 날씨는, 하늘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올 여름엔 다른 거 안바란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이런 하늘이라서 빨래 맘놓고 널어놓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이사를 하면서 짐들을 버리고 버리다 보니 샘솟았던 쇼핑 욕심이 봉인되었다. 이걸 사면 내 옷장에 들어갈 자리는 있는가? 또 버릴 걸 사는 건 아닌가? 따지다 보니 쇼핑을 자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평일, 영화보러 갔다가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렀고, 꼭 필요해서 산다는 명목 하에 수경과 수영모를 사면서 눌러왔던 물욕이 봉인해제 되었다. 이후 바지를 2벌 질렀고, 다음 날엔 치렁거리던 머리를 싹둑 잘라 30여년 만에 귀파는 숏컷을 해버렸으며, 내내 망설이던 블루마운틴 우븐슈즈를 30% 세일 미끼에 낚여 또 한켤레 질러버렸다.
여름 시작하면서 늘어난 바지 버렸더니 여름에 마땅히 입을 긴 바지가 하나도 없었는데, 며칠 사이에 나에겐 바지가 4개나 생겼다. @.@ 쇼핑 물결의 마지막 점을 찍은 위 바지. 이 바지는 그러니까 백화점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는데, 주머니가 없는 것에 비해 너무 비쌌다. (4만원에서 100원 빠지는 가격) 주머니가 있었거나 가격이 좀 쌌다면,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었다면 덥석 샀을 것이다. 그래서 이 바지 대신 다른 바지를 두 벌이나 사갖고 집으로 돌아왔지만...그렇지만 이 바지가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결국 인터넷 켜놓고 '스트라이프 바지'를 쳐넣고 있는 나. 네이버 쇼핑의 이미지 검색에서 똑같은 바지를 찾았다. 들어가 봤더니 반값!! 정확히 19800원. 배송비가 붙어 2만원이 넘긴 했지만(그리고 평소라면 배송비 아깝다고 7만원을 꾸역꾸역 채웠겠지만) 과감히 한벌만 결제하고 받았다. 으흐흐...넘나 좋은 거. 그러나 이제 올 여름 쇼핑은 이걸로 그만~

어제 독산동 모두의학교에서 박준 시인의 북토크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거기 참여하게 되었다. 팀장님으로부터 진행해달라고 전화가 왔을 때 절대 안된다고, 나는 시를 싫어한다고까지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전화를 끊고나서 몇년 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박준의 시집을 꺼냈다. 한두편만 읽고 말아야지 했으나, 다른 급한 책 다 팽개쳐두고 절반 넘게 읽었고, 포스트잇을 구절구절 붙이면서 '아...한다고 할 걸 그랬나?' 후회가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다음 날 친구들을 만났더니 왜 거절했냐며 당장 다시 전화하라고 해서, 좀 없어보이지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렇게 달려가 시인님과 같은 대기실에서 커피도 마시고(물론 각자 마셨습니다. 쿨럭) 잠깐의 틈을 타 시집에 사인도 받았다.
마이크가 없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오프닝을 하고 시인님을 모셔놓고 제일 앞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나보다 강의를 월등히 잘 하심. 무척 재밌었다. 수식어를 쓰지 않는 주어+동사 문장의 힘에 대해 그렇게 쏙쏙 들어오게 설명을 하다니!
'풍요로운 가을이다'와 '가을이다' 중 가족을 더 걱정하게 만드는 글귀. '출렁출렁 황금빛 들판 허허허허 허수아비'와 '들판에 허수아비가 있다. 나도 그 옆에 서고 싶다'의 차이. 그리고 통오징어 뱃속에서 나온 정어리에 냅킨을 덮어두는 마음들.
끝나고 책 추첨 진행하느라 시인님 가는 것도 못봤는데, 모냥 빠지지만 다시 전화 걸어 진행하겠다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하루였다. (사진은 한번도 앉지 않았던 시인님의 자리. 시인님의 가방만 의자 밑에서 자리를 지켰다.)

에헤헤헤 시집에 받은 사인.
이를 계기로 집에 처박아 놓은 다른 시집들도 꺼내 읽기 시작해야겠다. 읽다만 이규리 시집부터!



덧글

  • 명품추리닝 2018/07/08 16:10 # 답글

    여름옷 쇼핑 축하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쇼핑은 역시즌입니다. 저는 롱패딩과 구스조끼, 니트티 질렀어요~><
  • 이요 2018/07/08 17:38 #

    옷장이 한칸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패딩과 구스 등은 들어갈 자리가 없어효! ㅠ.ㅠ
  • 진이 2018/07/08 23:18 # 삭제 답글

    나만의 넓은 부엌과 아담한 튀김솥이 필요해....
  • 해리 2018/07/09 09:13 # 삭제

    아담한 튀김기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어서 최화정네 같은 넓은 주방을 마련하시면..쿨럭!
  • 달디단 2018/07/17 11:29 # 삭제 답글

    언니의 취향저격 컬러를 모아 놓은 저 바지... ㅋㅋㅋ 특히 저 톤다운 하늘색은 이제 언니색이라고 해도 될 듯! 아, 그리고 박준!! 박준이라니!!! 좋겠다!
  • 이요 2018/07/17 11:45 #

    어쩌다 저 색은 나의 색이 되어버렸는가? 예전에는 별로 좋아하던 색이 아니었는데 3~4년전부터 꽂혀서 가방부터 옷, 스카프까지 죄다 저 색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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