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돼가? 무엇이든 읽고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 아르테

이경미 감독의 <미스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재밌게 봤지만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대체 뭣 때문인지는 모르지만(모르지는 않는다. 내가 페북에서 몇 개의 출판사 페이지를 좋아요 눌러놓고 구독하기 때문이겠지) 이 책의 광고가 내 SNS에 줄창 떴기 때문이다. 광고 너무 많이 하는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이 책은 재밌겠지만 읽더라도 나~아~중에 읽어야지 했다. 그런데 이석원(언니네 이발관, <보통의 존재> 작가)의 블로그에서 이 글을 읽었다. 그때 이석원은 당의정 발린 위로의 책 안좋아한다고 글 올렸다가 사람들의 댓글을 받고 거기에 변명하던 중이었는데, <잘돼가? 무엇이든>이 바로 자신이 원하던 책이라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됐다. 이렇게 빨리.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우리동네 도서관에는 이 책이 신간으로 떡 들어와서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상태로 진열되어 있었다. 서강도서관, 사랑해요!!)
다 읽고 보니 이석원의 에세이와 비슷한 구석도 있고, 이랑의 에세이와 비슷한 구석도 있다. 
영화만 봐도 이감독님이 시쳇말로 똘기충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글도 참 어쩜 이렇게 쓰는지... '갈대 무성한 들판에서 양손에 낫을 들고 베어가며 사는 팔자'라는 사주풀이에 분노를 터뜨리며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아요? 아저씨이~" 외칠 때부터 웃기 시작(당사자 입장에선 웃을 일이 아니다. 외국인 원수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성질 참고 촬영한 날 창밖으로 남대문이 불타고 있었다니...ㅋㅋㅋ)해서, 박찬욱 감독이 덜쓴 시나리오 보고 이걸 미국에서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하자 '저는 아직도 풀지 못했는데 이걸 가지고 리메이크를 하신다고요? 그럼 저는 이걸 언제 다 쓰는데요? (오열)' 되묻는 장면에서 엄청 웃고, 나중에 밧데리 찾는 감독에게 '박대리님, 박대리님 감독님이 찾으십니다' 무전쳤다는 장면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오밤중에 이불 위를 구르며 웃다가 눈물까지 흘렀다. 진짜 웃긴다. 
인생은 그 안에 들어가면 비극이고, 3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던데, 이 감독님 인생이 그런 듯. 사실 써놓은 에피소드들이 실제 내가 들어가 살면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글로 써놓고 나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읽으니 이렇게 웃길 수가 없는 것이다. 넘나 부러운 것. 이런 코미디적 소질은 타고 나는 건데, 나도 내 인생을 이렇게 코미디로 풀어놓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하여간 감독님, 다음 작품도 기대합니다. 다음엔 꼭 극장 가서 볼게요! 

밑줄긋기
27 _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서른 살은 그렇게 끔찍한 나이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서른 살이 됐을 땐 어찌나 신나던지, 서른 살은 삼십대의 시작이니까 이십대에 다 망친 거 없다 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단 말이다.
73 _ 그동안 살면서 깨달은 점 하나는, 선의와 도덕성이 아무리 충분해도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닌 사람에게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88 _ 누군가를 혐오한다고 말할 때는 그 대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115 _ 내가 못나서 폐를 끼쳤을 직장 동료들에게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잘돼가? 무엇이든>의 '희진 씨'를 만들었고, 짝사랑에 실패한 나에게 '제발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마!'라고 다짐하며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에게도 모성애가 있을까?'하는 두려움에서 <비밀은 없다>의 '연홍'을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 아주 별로는 아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고 나를 설득하고 싶었는데, 들인 정성에 비해 성과는 그닥 좋지 않아서 지금도 저 인물들은 영화 속 비호감 캐릭터 리스트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117 _ 그래서 '감독 입봉 준비'는 정말 어려운 터널이다. 실패를 해야 그만둘 명분이 있는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패배감을 가질 일이 다반사라서, 어디서부터가 실패인지도 본인이 정해야 한다.
211 _ 어둡고 긴 터널을 외롭게 지나던 시절이 있었다. 약도 안 듣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틀어놓지 않고 혼자 견뎠다. 입은 꼭 다문 채 점점 마르고 새까맣게 변해가는 나를 본 뒤로 엄마는 매일 밤 "편안히 잘 자라" 문자를 보내주었다.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저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덧글

  • 스텔러바다소 2018/08/04 16:36 # 답글

    저도 이 책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조만간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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