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읽고

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 | 을유문화사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신선한 관점이고 놀라운 사실들이라고 받아들였는데, 그간 저자가 '알쓸신잡2'에 출연해 여러 이야기를 하고, 상가에 관한 그의 의견이 황두진의 무지개떡 이론이라는 걸 알고 나니 <어디서 살 것인가>는 도시 건축을 전방위적으로 얄팍하게 훑은 인문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알쓸신잡'에서 들은 이야기의 리바이벌 같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 중 재밌는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남의 책에 나온 이야기다. 어느 책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출처를 밝혀준 건 마음에 든다. 독서모임의 다음 책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여서 차마 첫 장을 펴지 못하고 깊은 한숨만 쉬었는데, <어디서 살 것인가>에 요즘 반려동물의 동물권에 관한 논의가 많은 것은, 유발 하라리의 의견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간이 동물과 같은 류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급 <사피엔스>에 호감이 가면서 책뚜껑을 열고 서문을 읽게 되었다.
사실 건축가가 학자도 아니고 얄팍해도 광범위하게 훑어주는 건 또 그 나름의 미덕이 있으니 재밌게 읽긴 했다. 
골목길과 엘리베이터를 비교하며 '우리 우울한데 엘리베이터나 타자' 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부분에서 빵 터졌고, '상업시설 없이 산책로만 있는 곳에 누가 가겠는가?'라고 적혀 있길래 '나' 했더니, 그 다음 줄에 '시간 많은 사람만 간다'고 나와 있어서 또 빵터졌다. ㅋㅋㅋ
흉물스럽다고만 생각했던 서울시청 신청사와 DDP에 대해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건축이라고 진단한 건 멋졌다. '신축 건물에게 언제까지 과거 건축물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라고 강요할 것인가, 고려청자만 고집했다면 조선시대에 백자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부분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후드티는 자기 공간을 갖지 못한 빈민들이 입는 옷이라며 후드를 지붕에 비유한 것도 그럴 듯 했고,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미국은 고층건물을 짓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고층건물은 불안하기 때문에 짓는 거라는데, 대체 롯데는 뭣이 그렇게 불안했을까? 
미국의 4대 부자 이야기도 재밌었다. 밴더빌트가 철도를 깔고 등유 파는 록펠러에게 제안해 그 기름을 나르다가 록펠러가 너무 부자가 되니까 다른 업자를 키우려고 해서, 록펠러가 열받아서 철도 대신 송유관을 깔아버렸다는. ㅋㅋㅋ JP모건과 에디슨이 손잡고 승승장구 하다가 에디슨 회사의 사원이었던 테슬라가 교류 시스템을 들고 웨스팅하우스의 투자를 받아 성공시키자 열받아서 교류전기의자로 사형 집행하는 시범을 보이는 바람에 전기 사업 자체가 위기에 빠지고, 모건이 웨스팅하우스를 파산시키려다가 테슬라가 특허를 포기하는 바람에 기사회생하고, 결국 모건은 교류전기+수력발전으로 GE를 설립한다. 와..난 에디슨이 승리하고 테슬라가 망한 줄 알았더니 교류전기가 승리했었구나. 전기가 승승장구하자 등유가 안팔리는 록펠러. 휘발유로 눈을 돌렸고, 엔진을 만든다. 이때 포드가 포디즘이라는 생산라인을 만들고, 할리와 데이비슨이 오토바이를 만들고, 자동차가 탄생함으로써 휘발유의 시대가 온다. 캬~~
한옥과 우리나라 건축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한국이 제국이 되지 못한 것은 산이 너무 많아서라고. ㅋㅋㅋ 직접 산(지구라트, 피라미드)을 만들어야 했던 이집트 같은데 비해서 우리는 이미 산이 있으니까 그렇게 만든다고 산보다 더 높을 수도 없고. 또한 기와와 초가지붕의 차이가 단지 재료들의 차이가 아니라 기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 수 있느냐의 차이라는 것, 또한 다리를 만들 때 기둥 간 길이와 다리 길이도 마찬가지로 그런 큰 나무를 지탱할 수 있느냐, 가져올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는 것 등은 재밌는 사실이었다.  
교통수단이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데 13년 밖에 안걸렸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그러니 3D프린터가 상용화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뀔까를 생각해보면 약간 걱정도 된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이 책에 언급되는 원전 책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렇게 훑어주는 것 말고. 앞으로 유현준이 다시 책을 낸다면 읽지 않을 것 같다. 두 권이면 충분하다.

밑줄긋기
38 _ 요즘 학교에서 '짱'을 먹는 아이들은 축구를 잘하거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교에 축구하는 운동장과 공부하는 교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을 못하는 아이들은 12년 동안 지옥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축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한다면, 그 아이가 학교에 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49 _ 물론 처음에는 100점 만점에 50점 이하 수준의 학교를 피하기 위해 만든 디자인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런데 이 가이드라인이 너무 많아져서 50점 이상 수준의 학교 디자인은 나오기 힘들게 되었다. 이게 우리나라 학교 건축의 현실이다.
82 _ 인공지능은 지능으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인간을 지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동물과 같은 계단에 서 있으라고 말한다. 인간은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해 주었던 종교의 권위도 없앴다. 인간은 점점 동물과 동등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동물이 된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동물의 존엄성을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182 _ 따라서 모든 건축물은 누군가가 돈이나 권력을 써서 운동에너지인 노동력을 만들고, 이 운동에너지가 '위치에너지로 바뀐 결정체'다. 
247 _ 우리 조상들 집의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지 않다. 한옥의 마당은 정원이 아니라 작업장이기 때문이다.
249 _ 모든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결과물이다.
303 _ 역사 이래 하늘 아래 빈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건축 업자가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공중에다가 없던 부동산 자산을 만든 것이다.
315 _ 미래학자들은 향후 주요 대결의 무대가 기조느이 국가 대 국가에서 국가 대 다국적기업의 대결로 옮겨 갈 것으로 보고 있다. 점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다국적기업과 그것을 막기 위해 통합된 세계정부를 만들려는 행정부들 간의 대결이 세계사의 주요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352 _ 건축이 다른 예술과 다른 큰 차이점은 가장 근본적인 자연법칙인 '중력'을 이겨 내려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건축은 감동이 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