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읽고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 컬처그라퍼

<여행할 권리>를 참 재밌게 읽었는데, 그 후로 김연수는 여행기를 론리플래닛 매거진에 연재해왔나 보다. 4년 넘게 연재한 그 칼럼들을 모아 낸 책이 이 책이다. <여행할 권리>처럼 아사무사한 제목들(다시 돌아와 내 눈 앞에 선 코끼리 | 모든 삶을 다 살 수 없으니 나는 연필을 사겠다 | 카프카의 불 피우는 기술 등등) 밑에 사진 한장 안들어가고 글만 빽빽한 여행기다. 그래도 이번에는 엄유정의 그림이 간간이 들어가 있다.
<여행할 권리>보다 글이 짧아서 살짝 감질이 났지만, 내가 갔던 여행지에 대해 그가 써놓은 문장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나는 진심 육성으로 "아..." 소리를 내면서 밤의 알함브라 궁전 앞에서 카푸치노 한 잔이면 충분했던 그를, 리스본 28번 트램에 앉아 'Ainda'를 들으며 거리 풍경을 바라보는 그를, 샌프란시스코만을 바라보며 리 오스카의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들으며 달렸던 그를 가슴 뻐근해지도록 부러워했다. ㅠ.ㅠ 심지어 두바이 환승할 때 밀 바우처로 컵라면 먹은 것까지 부러웠다. 이건 올해 비행기 한번을 못타봐서 그런 건 아닌게 아닌 게 아닌 게 아니다. 쿨럭. ㅠ.ㅠ (우리의 내년 소원 : 장거리 비행)
재밌고 가슴 따뜻해지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니 반가워하면서 한국말로 인사하던 이란 소녀 3인방은, 경찰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자기들이 시스타의 노래와 춤을 얼마나 잘 따라하는지 보여줬다. 문구점에 한번 들렀으면 좋겠다고 주최측에 이야기했더니, 가이드 마리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안내하다가 "저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번째로 큰 문구점입니다!" 안내해준 이야기(그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도 좋았고, 수십년 간 같이 산 낙타고기를, 씹어도 씹어도 씹어지지 않는, 병으로 죽은 낙타고기를 먹은 일화도 좋았다. 
안중근이 하얼삔에서 손가락을 끊은 사실은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못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테니, 전 세계에 참수 장면을 생방송하는 테러리스트와 안중근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일갈도 신선했다. 그는 이토의 얼굴조차 몰랐고, 그저 가장 높아보이는 순서대로 저격했을 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안중근학교 교장 후보였고, 나는 안중근기념관에서 특강 했던 사람이다. ㅋㅋㅋ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이 의지!) 
독일 밤베르크에 소설을 쓰려고 갔지만, 오후 4시면 문닫는 수퍼마켓 때문에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는 변명(이제 잡다한 일은 대충 끝났으니 책상에 앉아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생각한다. 주인공은 북한에 밀입국하기 위해 베를린에 온 대학생인데, 점점 외로워진다. 베를린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건 낯설고, 무엇보다 '슈퍼마켓이 너무 일찍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어 시계를 보면, 이미 3시가 넘었고 이제 장을 보지 않으면 저녁을 못 먹는다. 4시가 되기 전에 슈퍼마켓에서 파스타와 물 따위를 사서 돌아오면 온몸이 녹초가 된다. 그러나 먹어야 소설을 쓸 수 있는 법. 등등)이나, 군대 갈 때 주변에는 다들 애인 붙잡고 울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한테 "군대 마이 좋아졌네" 소리나 들으며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데굴데굴 굴렀다. ㅋㅋㅋ 

책을 읽고 부산 가야시장에서 186번 버스 타보기, <비행의 발견> 읽기를 버킷리스트에 넣었다. 그나저나 후유증이 너무 큰 책이다. 여행 가고 싶다. 나도 여행 가고 싶다. 나도 샌프란시스코 베이 들으면서 뛰고 싶고, 리스본 언덕 식당에서 환갑넘은 할머니 가수에게 파두 듣고 싶고, 라스베가스 사막 도로에서 크루즈로 놓고 책 읽고 싶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연필 한 자루 사고 싶고, 고래 고기 안주에 니혼슈 먹고 싶다아아아아...ㅠ.ㅠ 

밑줄긋기
5 _ 여행자라는 약한 존재가 되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람의 선의에 기대는 법을 익히게 됐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는 근처에 숙소를 찾아가는 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 동네 주민에게는 산책만큼 쉽다. 그러므로 그 여행자에게 필요한 행운은 단 한 사람, 그 숙소의 위치를 아는 현지인을 만나는 일이다.
31 _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73 _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병들거나 세상을 떠나 비행기에 오르게 된 많은 사람이 그 비행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정적 속에서, 혹은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바라보는데, 그때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고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을 목격하고는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행이란 누군가에게는 설렘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이리라고만 짐작했다. 내가 탄 비행기에 슬픔에 잠겨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또 그들이 평소에는 보지 못한 뭔가를 바라보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 그런 승객을 상상하는 조종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91 _ 세계가 점점 평평해지는 동안, 가슴 설레는 일도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105 _ 그러니까 소설가는 작품으로만 평가받는 사람이기에 언제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소설가라는 지위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주류 소설가라는 표현은 모순 형용에 가깝다. 
115 _ 세상이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인간이란 어디까지 긍정적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지옥도 정겨워질 때까지가 아닐까.
141 _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163 _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나 생생할 때 느껴진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83 _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사실적으로 쓴다는 말이고, 그건 그 작가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경험이 많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관찰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88 _ 종편 채널에서는 같은 사람이 나와서 연예인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재벌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정치인에 대해서도 분석하는데, 무속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나 말해도 되니까 가능하면 목소리가 커야 더 믿음직하게 들린다.
192 _ 서울은 마치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하던 소설책과 같았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멋진 책을 앞에 놓고서 누가 발췌독을 하리오? (누가 버스를 타고 다니리오?) 누가 요약된 줄거리와 서평에 만족하리오? (누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리오?)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235 _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삶은 잘 짜인 픽션이다. 삶은 여행에 곧잘 비유되니, 그렇다면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들려주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덧글

  • 긴호흡 2018/09/10 22:06 # 삭제 답글

    저도 <여행할 권리> 좋았었는데, 이 책은 절대 읽으면 안되는 책이겠군요!!! 특히나 발이 여전히 속 썩여서 집에만 처박혀 있는 요즘에는 더 말이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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