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읽고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예담

이다혜 기자의 여행 에세이. 이 작가가 책읽기를 즐기고 영화기자로 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여행광인 건 또 몰랐네. 
처음 여행을 몇번 갈 때는 갔다올 때마다 갔던 곳의 여행기를 내고 싶었다. 그러다 횟수가 잦아지고, 갔던 데 또 가게 되면서 점점 개개 여행의 감흥 보다는 내가 갔던 저 곳과 이 곳을 비교하거나 지구에 대해서,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개개 여행의 여행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건 가이드북에 다 나오는데...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며, 그 결과 나는 단 한권의 여행기도 쓰지 않았다. 물론 개개 여행의 기록은 내 블로그에 깨알같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삼천포로 빠진 결론 같지만 아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추임새입니다) 
그러니까 이다혜 기자의 이 에세이는 여행을 자주 다니고, 오래 다닌 사람이 나중에 쓸법한 여행기다. 어느 특정 지점의 세세한 감상과 정보는 사라졌지만 여행을 자주 다닌 자의 물 흐르듯한 여행에 대한 감상, 혼자 간 여행과 같이 갔던 여행의 차이,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여행지를 떠오르게 하는 배경 음악과 배경 책, 사진처럼 각인된 어떤 장면에 관한 이야기 등이 나온다. 이 가운데 두어편 정도는 이미 읽은 에세이였는데(ize에서 읽었는지 씨네21에서 읽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여자에게 여행이란'이라는 제목의 글은 대학생 배낭여행이 활성화된 후 여자들은 살이 쪄서 돌아오고, 남자들은 핼쓱해져서 돌아오는 이유에 관한 고찰이었다. 그럴듯해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엔 "자궁.."하면서 부둥겨 안고 신음하는 여자들의 연대에 100퍼 공감했다. ㅋㅋ 그런 글들이 빼곡하다. '비행기를 타고 열네 시간을 날아가니 영등포였다.'를 <설국>의 도입부톤으로 읽으라는데 빵터지기도 했다. 
그녀와 나의 여행(혹은 여행에 대한 생각)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5성급 호텔 바다뷰 방에서 파도 소리 때문에 밤새 잠을 못자고, 그 사실을 가족과 공유해야만 했던 엄마 이야기는, 다른 효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경험했을 뿐 나는 못한 경험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여행하는 게 엄청 좋았지만 엄청 힘들어서 혼자 여행을 자주 간다는 부분도 나와 달랐다. 일본의 어느 절에서 이어폰을 빼니 적요의 소리가 들렸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왜 여행 가서, 그것도 산사까지 가서 이어폰을 꽂고 있지?" 약간 분노하기도 했다. 나는 외부 소리를 차단하려고 이어폰 꽂는 행위에 언제나 약간의 분노를 느낀다, 항상. 비오는 11월의 에딘버러 날씨를 좋아하는 것도 나와 달랐다. 기본적으로 비오는 날을 좋아하긴 하지만, 여행지에서 그것도 11월에 오는 비는 정말 달갑잖다.
하지만 서울의 걷기 좋은 길에 대해서는 100퍼 공감(내가 꼽는 북촌 가회동, 정동 덕수궁, 서촌길까지 똑같음)했고, 여행지에 책을 바리바리 싸다니는 것도 똑같았다. 나이 들어 이제는 8인 도미토리 방 같은 건 안쓴다는 것, 비행기에서의 낭만을 꿈꾸지 않고 제발 멀쩡한 사람이 옆에 앉기를 바라는 것도 같다. 대구 출장 간다고 대구 맛집이 어디냐고 묻자, 대구 출신 지인들이 동공지진을 일으켰다는 말에도 빵터졌다. 나한테 물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ㅋㅋㅋ (사실 경주 가는 지인들이 경주 맛집을 물어오면 업데이트도 안된 20년 전 맛집을 이야기해주며 식은땀을 흘리곤 한다.)
에피소드들 중엔 베이징의 북한식당에 혼자 들어가 평양냉면과 김치를 먹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고, 시스티나 성당에서 3만원 짜리 가이드를 들은 일(가서 사진 찍어본 입장에서 가이드 말에 100퍼 공감. 찍어봤자 나오지도 않는다. 그 시간에 눈에 넣는 게 낫다)을 읽으면서는 책에 적힌대로 구글에 Pieta, Robert Hupka를 검색해 위에서 바라본 피에타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내장과 부속물 음식을 안먹지만 홋카이도의 스프카레에 대해서는 침을 삼키며 읽었다.
아마 올해 비행기 타고 떠나는 여행을 못해서 더더욱 애틋하게 읽은 책이 아닌가 싶다. 진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가고 싶은 마음.^^ 

밑줄긋기
7 _ 대단한 모험가는 아니었다. 나는 편도 티켓을 사본 적이 없다. 나의 여정은 언제나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닫힌 원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원을, 무한에 가깝게 반복해서 그리고 싶었다.
8 _ 사회생활에서 나빴던 것이 좋게 기억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여행에 관해서라면 악몽에 가까웠던 많은 것들이 웃음과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곤 한다. 
13 _ 나는 여행을 떠나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 자신을 가지고 간다. 속옷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 있는가? 성지에? 템플스테이에? 인도에? 내 자아는 내 집,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비일상의 경험을 하며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일이다.
14 _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커트 보네커트 <제5도살장>)
79 _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 다 없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자산이 있다. 육체적 젊음이나 시간 같은 게 그렇다.
98 _ 돈을 들여 고생해보고 그 고생을 통해 배우는 일. 일상에서라면 우리가 마냥 절망하고 우울해할 그 경험들이, 여행이라는 이름 아래 놓이면 무용담이 되고 추억이 된다.
132 _ 순전히 그림이나 사진이 좋아서 사는 책도 있다. 책 샀을 때의 기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떠오르니까. 이것은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139 _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수록 제대로 이용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148 _ 나는 얼마든지 다른 장소에 갈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는 없다. 아마도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할 때 발견이 가능하다면, 그가 나와 다른 눈을 가지고 있어서이리라.
257 _ 사진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행의 재미라는 것은 퉁퉁 부은 발과 견딜 수 없는 허기짐, 약간 춥거나 더운 날씨와 그 모든 불평을 일시에 잠재우는 "와..."의 순간, 말을 잊게 하는 그 한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에는 상쇄해야 할 고통이 없다. 원래 상쇄해야 할 고통이 있으면, 별로 안 좋은 것도 더 좋게 느끼고 그러는 법이거든.(웃음) 그리고 그런 정신승리는 어떤 경험이든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덧글

  • 해리 2018/10/04 10:08 # 삭제 답글

    장바구니에 담아놓고만 있던 책. 뜨허!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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