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읽고

해리 1, 2
공지영
해냄

공지영을 참 좋아하다가 지난 대선 때 이후로 마음이 돌아섰다. 문재인을 극렬 지지했던 그녀는 선거 막바지에 심상정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사람들을 마치 민주주의에 무임승차하는 사람인양 다그치며 비난했다. 이전까지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반대쪽에 서보고서야 그녀가 얼마나 글이라는 칼을 휘두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카톨릭과 장애인 센터, 봉침 등이 그녀의 SNS를 채울 때, 예전이라면 무슨 사건인가 관심을 가지고 기사도 읽어보고 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고, 분명히 이 사건이 <도가니>처럼 소설로 나올 것임을 알았기에 그때 가서 소설로 읽어보자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

서울의 작은 인터넷 매체 기자인 한이나는 화가인 엄마가 암에 걸려 병구완을 하기 위해 고향 무진으로 온다. 고교 시절 성당의 백신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서울로 올라와 다시는 내려가지 않았던 고향이다. 그런데 고향에서 백신부는 여전히 명망있는 신부였고, 그가 돕고 있는 장애인 보호센터 '엔젤스윙'의 대표는 한때 이나의 친구였던 이해리다. 해리는 미혼모로 자기가 낳은 아이에 입양한 아이까지 기르며 역시 성모 마리아처럼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이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해리가 딴 주머니를 차고 장애인을 착취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살인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무진일보의 남기자는 카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소망원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기사를 쓰지만 매번 데스크에서 짤린다. 이나가 백진우(신부)와 이해리의 가면을 벗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인권센터 서유진 소장, 강변호사 등을 만나 도움을 받지만, 시청도, 경찰도, 검찰도 모두 이해리 편이다. 

소설 시작 부분에 한 남자가 룸쌀롱에서 접대를 받다가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서 물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까지 이 남자의 정체가 뭔지 모르다가 편의점 알바생이 "신부님"이라고 부르고서야 신부라는 걸 알게 된다. 하, 뒷통수가 얼얼하다. 룸쌀롱에서 접대받는 신부라니! 이런 식으로 공지영은 매 챕터 사람 놀라게하는 장면들을 넣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한다.역시 프로다.
봉침이라는 게 벌침을 놓아서 병을 고치는 한의학적 방법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이런 식의 추잡한 일에 연루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공지영이 왜 SNS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못했는지 알만 했다. 읽는 내내 '이 사람들의 밑바닥은 어디까지 인가'와 '이 사람들의 보호막은 어디까지 인가'를 넘나들며 흥미롭게 읽었다. 백신부도 해리도 정말 대단한 캐릭터였고, 수녀님들과 신부님들도 제각각 놀라운 캐릭터였다. 이 와중에 이나와 강변호사의 멜로라인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 
<도가니>에서도 나는 주인공 강인호에게 엎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장애가 있는 고아도 아니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나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유약한 강인호에게 엎힐 수밖에 없었다. <해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해리가 자신의 미모와 몸을 이용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 동안 그녀는 악의 화신이었지만, 그녀가 이나에게 받았던 상처를 늘어놓을 때 (비건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냄새 난다고 했던 말) 나는 이나가 되어 부끄러웠다. 아마 나도 이나처럼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업신여기며 그런 말들을, 일들을 해왔을 것이다. 강변호사가 가난한 것과 비참한 건 다르다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도 따듯하면서 가슴 아팠다. 그러게요...그럴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가난과 비참을 동의어로 생각할까요?  
사실 놀라움으로 뒷통수가 얼얼했던 1권에 비하면 책의 후반부는 좀 아쉬웠지만, 모든 일이 잘 해결되고 끝난다면 그게 판타지지 현실이겠나. 
나는 바로 이런 소설이 공지영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소설을 쓰기 때문에 공지영은 꼭 필요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정말 많은 사람이 공지영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문장이 엉망이라 소설가의 기본이 안되어있다는 비난부터 이렇게 쓸거면 다큐를 쓰지 왜 소설로 썼나까지.(글쎄 공지영이 남자였어도 그렇게 비난했을까?) 하지만 한국 소설 중에 공지영이 관심을 가지는 계층과 그 계층에 대한 착취, 시스템이 묵인하는 비리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춰 보이며 고발하려는 작가가 있는가 물어보면, 역시 공지영 뿐이다. 
사실 강화도 우리마을 가기 전에 이 소설 1권을 읽었다. 그러니 장애인 시설이 곱게 보였을리 없다. 마음 한가운데 의심을 품고 앉아 인터뷰 내용을 메모하는 중에 주교님이 그러셨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 비리 같은 뉴스가 나오면 후원이 확 줄어들어요."라고. 하...제대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그것대로 참 힘들겠다. 그저 내가 본 우리마을이 미카엘 신부님의 마을 같기만을 바랄 뿐이다.  

밑줄긋기
<1권>
47 _ 사람이 성장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간의 종말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함도 알게 되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 기준이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122 _ 나중에 이나는 동성애자도 아니면서 군대에서 같은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그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섹슈얼하다는 의미를 붙여 그것을 성추행이라고 하지만 당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그저 잔혹한 고문이었고 야만적인 폭력일 따름이었으며 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벌레라고 하는 듯한 모멸의 폭포였다.
198 _ 원래 세상은 이렇다, 는 말은 무섭다. 어떤 노력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200 _ 만일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사람의 이름과 인생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저 집단으로 처리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집단적으로 죽은 사회이다.
256 _ 언젠가 망한다. 그 언젠가가 올 때까지 손놓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한 번뿐인 젊음이나 가족, 혹은 생 전체를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젠가 망한다', 이 말처럼 무책임한 것이 또 있을까.
<2권>
52 _ 풍랑을 만난 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속력으로 그 풍랑을 넘어가는 일뿐이다. 동력을 끄거나 머뭇거리면 배는 곧 파도에 휩쓸린다.
84 _ 노예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랑질을 시작한다고 하더군요. 내 쇠사슬은 명품이야.
86 _ 언제부터인가 가자들은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자체적으로 검열하기 시작했다. 자체 검열은 검열자가 바라는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88 _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위안이었다. 확실히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선 끝에 갔을 땐 그랬다.
158 _ 거짓말쟁이들은 아홉 가지의 참에 한 개의 거짓을 얹어 그 마지막 거짓을 앞의 아홉 개의 참과 같이 보이게 한다는 것을.
171 _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있고 나면 그 변명은 어떻게 해도 당사자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 이미 더러운 구정물을 덮어 써버리고 난 후, 어떤 옷으로 갈아입어도 냄새는 남는다. 그리고 사람들 기억 속의 구정물도.
260 _ 내가 비난하던그 주교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어서 내가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어요. 여기 있는 우리 미카엘 신부 같은 사람은 주교 그 사람 안에 있는 거 들어다보지도 못해. 주교 그 사람 안에 있는 게 이 사람 안에는 별로 없어서 이 사람은 그걸 보기가 힘들어... 하지만 나는 알았던 거예요. 내가 주교와 닮은 이여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걸. 그러니 나 또한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르면 언제든,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구나....


덧글

  • 룰루랄라나 2018/10/30 15:20 # 삭제 답글

    편독을 하는 저에게 언니의 리뷰는 늘 울림있네요 보고싶지 않던 현실을 펼치는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들~꼭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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