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읽고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 난다

아...글이 이렇게 좋구나...하면서 읽었다.
비평가의 글은 어렵고 딱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신형철과 황현산을 보면 가장 세심하게 조율하여 문장을 쓰는 사람들이 비평가가 아닌가 싶어진다. 
한국일보에 한달에 한번씩 쓴 칼럼을 모아 엮은 책이다. 박근혜 시대를 지날 때여서, 날짜가 2014년 4월이면 마음이 다 내려앉았다. 다음 달 칼럼에는 어떤 글이 올라올까 싶어서. 성품이 부드럽고 배려가 있는지라(그게 글에 보인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장외투쟁할 때 자신이 겪은 한국일보 기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응원하고 동시에 이런 글을 실어주는 한국일보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나타낸 글이 인상적이었다. "아내도 가족도 모르는 남자만의 세계가 있다"는 남들 말에 자신은 그런 세계가 없어서 당황했다고 할 때는 귀여웠다. 여자들에 대한 태도가 그 나이대 아저씨들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PC해서 좋았다. 한글 사전이나 방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으로써 반가웠고, 프랑스 문학이나 시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것을 알게 해줬다. 뒤쪽의 비평문은 오히려 칼럼보다 별로라, 글을 잘 쓰는 분들도 본격 비평에 들어가면 이렇게 밖에 쓸 수 없구나 좀 아쉬웠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이런 문장가를 알게되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딘가. 
 
밑줄긋기
34 _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41 _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인간의 말은 물론이고 개와 닭의 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지만, 그렇다고 한글이 외국어를 표기하는 발음 기호는 아니다. 우리가 오렌지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것은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을 위한 것이지, 외국어를 학습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잊히기 쉬운 사실이다.
85 _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는 20여 년의 세월에 걸쳐 180여 명의 집필자를 동원해 본문 17권 도판 10권의 '백과전서'를 만들었다. 그때도 국가는 그 집필과 출간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사전은 이념의 민주주의다. 
107 _ 세상의 거대한 변화는 농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예고했던, 디드로의 해학 넘치는 소설 '라모의 조카'나 보마르셰의 희극 '피가로의 결혼'이 그 증거다. 봉건 시대에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이란 말보다 더 새로운 농담이 어디 있었겠는가.
119 _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24 _ 교육에서 격려와 칭찬은 늘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칭찬이라도 '잘하고 있다'와 '너는 천재다'는 아이의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소년 시인이었던 아이가 어른 시인이 되는 예는 없지만 않지만 매우 드물다.
154 _ 연애를 포기했다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며, 결혼을 포기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행복을 가능한 행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겨를도 욕망도 없다는 뜻이며, 출산을 포기했다는 것은 미래에도 내내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156 _ 지옥에 대한 자각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 지옥이 자각된 곳이다.
179 _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254 _ 욕망하는 한은 행복함이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행복이 찾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연장됩니다. (루소)
275 _ 입은 동시에 '두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한꺼번에 둘 이상의 시간을 수직으로 품으며, 우리는 그 수직의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85 _ 번역이라는 말은 본뜻 그대로 쓸 때나 비유적으로 쓸 때나 모두 '언어가 전달 불가능한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말의 진실성을 여러 수준에서 요약해준다.
316 _ 시를 오래 썼다고 해서 더 이상 쓸 말이 없는 시인은 없다. 오히려 어느 나이를 넘기면, 아침에 잠 깨어 일어날 때마다 옹달샘의 샘물처럼 시가 한 편씩 고여 있는 시절이 온다. 시가 쉽게 써진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말.
328 _ 미당은 어떤 방식으로 서두를 끌어내어 이야기를 엮어도 중간에 '그러나'를 넣지 않고는 말하기 어려운 시인이다.
333 _ 신비로운 것은 어디나 있다. 그러나 여린 것들만 신비로운 것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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