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대한 두 입장 : 영화 '벨벳 버즈소' vs 연극 '레드' 보고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연극 본 보람이 있었다.

설 연휴 동안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벨벳 버즈소>와 연극 <레드>를 봤다. 둘다 현대미술에 대한 극이라 흥미로웠다.

제이크 질렌할, 르네 루소, 토니 콜레트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벨벳 버즈소>는 죽은 무명 화가의 그림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미술판의 하이에나들을 조롱하는 블랙코미디 겸 호러 영화다. 호러 대신 마지막까지 블랙코미디였다면 더 좋았겠다. 알콜중독에 걸린 화가가 술을 끊고 나자 더 이상 멋진 작품이 나오지 않고, 새로운 화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큐레이터는 공동체를 만들어 작업하는 화가 중 싹수 있는 놈만 꼬드겨 공동체를 와해시키려 하고, 무명의 화가가 죽자 그 새로운 작품을 자기 걸로 하기 위해 일단 변호사부터 불러 어떻게 해야 법에 저촉되지 않는지를 먼저 살피는 등 현대미술은 어떻게 돈이 되는가를 속속들이 보여준다. 그렇게 신랄하게 가던 영화는, 밑도 끝도 없이 원혼의 방해로 싹 다 죽여버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는 한물간 화가가 바닷가 모래밭에 나무 작대기로 의미없는 소용돌이를 그리는 모습을 비춘다.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가는 그 장면을 부감으로 오랫동안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머릿 속에서 '인간에게 예술이란 바로 저런 장난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돈놀이 판이 되었나' 하는 상념이 떠오른다. 
내내 허세스럽고 과하다고 느끼다가,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며 마음이 뚝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현대미술과 돈의 관계를 시니컬하게 바라보다 며칠 뒤 연극 <레드>를 보게 되었다. 몇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마크 로스코 전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초연되었고, 지금까지도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자유소극장 무대는 진짜 화가의 작업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객석과 무대는 넘나 가까웠다. 같이 간 동생은 혹시 배우가 연기 중간에 객석으로 올까봐 복도측 자리에 나를 앉히고 자기는 중간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극 중 강신일(마크 로스코)은 3번 담배를 피운다. 담배 연기가 매캐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금연초란다.ㅋㅋ 
극은 2인극. 달변에 말이 많고 고집불통에 괴팍한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반에는 로스코의 고집스럽고 안하무인인 태도와 달변에 질려서 뒷골이 땅겼는데, 막이 거듭되며 시간이 지나자 켄도 점점 대거리를 하게 되고, 나중에 둘이서 불꽃 튀는 말싸움을 할 때는 짜릿했다.
감정과 예술에 대한 로스코의 고뇌를 담은 장광설은, 그가 그림으로 억대의 돈을 번다는 사실 때문에 고깝게 들렸고, 켄 역시도 참다참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선생님은 부자들에게 돈 받는 성공한 화가일 뿐인 걸요."라고 한다. 내 말이!
아버지를 짓밟아야 된다고 그렇게 역설하던 로스코는 정작 팝아트(프랭크 스텔라,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를 못마땅해하고, 켄은 "추상표현주의는 팝아트에 밟힌 거라고요. 이제 퇴장하시죠."라고 한다. 와우 사이다!!
나는 말싸움 내내 로스코 보다는 켄의 편이었지만, 로스코가 "너는 그것에 대해 계속 그렸어야 했어. 집요하게 그것만 팠어야 했어."라고 했을 때는 힘이 빠지며 혼란스러워졌다. 아집과 독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진짜 자기 예술이 아닌가, 나는 그것을 못해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있나, 진짜 그랬어야 했나 고민하게 되었다.
이 극은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의 갈등, 예술가와 대중의 입장 차이 등 여러 층위의 텍스트로 읽혀 극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어쨌든 감동을 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크게 와닿는 사람은 창작하고 있는 사람들일 거다. 창작자에게는 얹힐 수밖에 없는 연극이었다.

<벨벳 버즈소>를 보고 현대미술의 주인은 화가가 아니라 누구를 띄울건가 혈안이 된 갤러리스트와 평론가, 아니 어쩌면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뒤 <레드>를 보며 그런 시장 안에서도 결국 예술가는 자기 작품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하는 존재라는 것에 승복하게 되었다.
연극을 보고 나와 로스코에 대해 찾아봤다. 로스코의 포시즌레스토랑 그림 환불 사건은 사실이었고, 죽기 전에 그는 그 벽화들을 테이트모던과 일본 가와무라 미술관 등에 기증했다고 한다. 당연히 자살인 줄 알았던 로스코의 죽음 역시 유가족들이 납득하지 못해 소송을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연극 내내 자기 그림을 보는 관객을 통제하기 위해 조명과 공간에 신경 쓰고, 그 체험 공간을 마치 건축가처럼 설계하는 로스코가 퍽 인상 깊었는데, 그 극치라 할 수 있는 로스코 채플에도 꼭 가보고 싶다.
나는 내 작품에 통제적인가? 아닌가? (내용을 바꾸라는 리뷰를 받을 때마다 속이 뒤틀리고 상하는 걸 보면 통제적인데, 한편으로는 알아서 생각해주겠지 하고 배경이나 인물 묘사를 대강하는 걸 보면 전혀 통제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창작자가 맞나? 예술가인가 아닌가? 나는 대체 뭔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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