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생각] 돈까스 살고

며칠 전, 남친과 저녁으로 뭘 먹을까 톡을 하다가 일단은 우리집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집에서 입던 옷 위에 유니클로 얇은 패딩만 걸치고 나섰는데,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추웠다. 꽃샘추위라지만 한겨울 같았다. 이런 날 외식하기는 싫어서 그냥 집에서 밥을 먹자고 톡을 보내고 장을 봤다. 농협과 롯데수퍼 중 어딜 갈까 고민하다 돈까스를 튀겨야겠다 결심하고 농협으로 갔다. 농협이니까 국내산 돼지고기로 만든 게 있을테지 싶었다. 냉장고 진열대 안에 딱 한팩 남아있는 돈까스를 사들고 왔다. 양배추랑 브로콜리도 사 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돈까스를 튀겨 먹자고 결심한 건 아마 <고독한 미식가7>을 본 영향이 큰 것 같다. 양배추를 채썰어 찬물에 담가두고, 브로콜리도 삶고, 식용유 듬뿍 부어 돈까스를 튀겼다. 겉은 타고 속은 덜 익은 거 같아, 1차 튀긴 걸 칼로 잘라 일부는 오븐에 넣어 돌리고, 일부는 다시 튀겼다. 큰 접시에 밥과 양배추채, 브로콜리를 담고 튀긴 돈까스를 올렸다. 소스도 뿌렸다.
그리고 한 입 딱 먹는데....억!!!!....냄새가 났다. 상한 냄새. ㅠ.ㅠ
사실 돈까스 팩을 풀었을 때도 냄새가 났었다. 그런데도 상했다는 생각은 못하고, 돈까스 먹겠다는 일념에 무시하고 그냥 튀긴 것. ㅠ.ㅠ 
정말 속상했다. 배도 고팠지만, 요리하는데 들인 시간, 노력 다 아까웠다. 간만에 요리한다고 싱크대는 엉망진창, 설거지통은 넘쳐나고, 기름 사방팔방 튀며 고생했는데, 상한 돼지고기라니요! 내 저녁 어쩔꺼야!! 내 저녁 돌려내!!! 
하나로마트에 전화했더니 죄송하다며 가져오면 환불해주겠다고 했다. 엉망이 된 부엌은 그대로 놔두고, 먹던 돈까스와 튀기지 않은 돈까스를 비닐봉지에 담아 하나로마트로 갔다. 환불받고 나오는데, 이게 다인가 싶었다. 내 망한 저녁은? 그 시간은? 노력은? 개진상이라도 떨었어야 했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나오다가, 근처의 맛있는 돈까스집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잊어버리자며 식당에 들어갔더니 "죄송합니다. 저희 8시까지 영업이라서요."라고 한다. ㅠ.ㅠ 8시 5분에 들어갔더니...ㅠ.ㅠ 결국 그날은 돈까스 대신 버섯칼국수를 먹었다. 

며칠 뒤, 그날 못먹은 돈까스가 삼삼해서 다시 그 식당에 갔다. 손님이 많아서 자리가 다 찼고, 하나 남은 자리가 방에 있었다. 옆테이블에선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계속 TV소리 같은 게 났다. 처음엔 식당에서 틀어둔 TV나 라디오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옆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였다. 스마트폰으로 영어 애니메이션을 틀어둔 것 같았다. 밥 먹는 내내 너무나 신경거스르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이해해보려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떠들거나 집중을 못하면 엄마들이 딴 일하려고 애니메이션 보여주기도 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밥을 먹는 시간이고, 아이는 얌전했다. 그런데 왜 시끄럽게 저걸 켜두지? 게다가 아이는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옆 테이블에 있는 우리를 쳐다보거나 엄마랑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계속 그 시끄러운 영어 애니메이션을 틀어두고 밥을 먹었다. 다 먹고 일어설 때에야 껐다. 밥 먹고 나갈 때는 "어떡하지? 엄마가 카드를 안가져왔네. 우리 00, 이 식당에 남아서 설거지 해야겠다. 엄마가 카드 안가져와서."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엄마를 보며 대체 뭐지 싶었다.
작은 방이라 뒷담화를 할 수도 없어 그들이 나간 뒤에야 한숨을 쉬었더니 남친도 꾹꾹 참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시끄러워 죽을뻔 했다고, 중간에 "그거 좀 꺼주세요" 하고 싶었다고. 
대체 왜 저걸 켜고 밥을 먹었을까 했더니, 영어 공부시키려고 그런 거 아니냐고 했다. 헐....영어 공부??? 밥 먹을 때 TV도 못보게 했던 구식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남친은 하루종일 저렇게 영어 애니메이션 틀어대면 아이가 정신적으로 문제 생길 것 같다고 걱정이었다.
그 식당에서 먹은 치킨까스는 넘나 부드럽고 맛있었다만, 식사 배경음악으로 영어 애니메이션 틀어놓은 아줌마 덕분에 신세계를 경험했다. 

덧글

  • 성장통 2019/03/18 16:17 # 답글

    저는 그럴 때 이어폰을 빌려 드릴까요? 물어봐요. 그래도 안 끄시면
    너무 시끄럽다고 꺼달아고 요청드려요. 그러면 꼭 "지들도 떠들면서..." 라고 구시렁대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때는 사람의 대화보다 tv에서 나오는 효과음, 성우들의 목소리가 귀에 더 꽂히게 되어 있다고 설명드려요. 골전도 이어폰이라고 청력에 부담주지 않는 이어폰도 나와있으니 이용해보시라고 권해드려요. 살살 경계를 타면서 서로의 불편함을 알리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 룰루랄라나 2019/03/19 15:49 # 삭제 답글

    엄마표영어 한다고 흘려듣기라는게 있던가 아마도 그 엄마는 그 식당에서 그러한 것을~ 애들 영어가 우선이 아니라 공중도덕이 우선인뎅~정말 고생한 이틀이셨네용~
  • 이요 2019/03/19 17:29 #

    그게 흘려듣기였구나.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어. 영어 느는 것보다 주의산만해지기 십상이던데...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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