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의심하기 살고

며칠 전 국회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10시쯤 도착해서 열람실로 들어가기 전, 로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소파에 앉아 언니와 수다를 떨며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 때부터 로비에 한대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들여다보던 노숙자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불쑥 나한테 다가오더니 머리 좀 묶어달라고 했다.
나는 잔뜩 얼어서, 싫다고, 나는 고무줄 없다고 했다.
내가 경직되어 싫다고 하자 이번에는 저쪽에 서 있는 여자청경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가고 난 뒤 나는 울상이 되어 "왜 나한테 머리 묶어달라는 거야?" 했고, 언니가 듣기로는 머리 묶어달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머리를 묶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머리 묶으면 여자로 착각하지 않겠냐면서.
묶어달라는 것이든 머리 묶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는 거든 왜 하필 나한테???

사실 도서관 다니면 노숙자나 정신상태가 약간 이상한 분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도서관에서 쫓겨나지 않을 경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 말만 할 때도 웬만하면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웅얼거리거나,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을만큼의 데시벨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뭐지? 

그리고 그날 저녁, 도서관을 나왔더니 비가 오고 있었다. 제법 빗방울이 굵어서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우리는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매고, 후드를 쓰고 빠른 걸음으로 국회를 빠져나갔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어떤 아줌마가 우산을 쓰고 다가와 우리에게 "나는 우산 하나 더 있는데 쓰실래요?" 물었다. 우리는 또 그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했고, 애매하게 웃다가 횡단보도만 건너가면 지하철 입구라 괜찮다고 하며 때마침 바뀐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런데 영 신경이 쓰였다. 그 아줌마는 별 뜻 없이 비맞는 우리가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그런 것 같은데, 우리가 거절한 게 잘못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켈레이터를 탔다. 그런데 그 아줌마가 에스켈레이터의 걸어가는 줄로 내려오다 우리를 보더니 "나는 진짜 우산이 두개라서 주려고 한 건데..."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죄송했어요. 그럼 받아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냅따 받았다. 
아줌마는 우산을 건네고는 시크하게 척척 걸어내려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우리는 홍대 앞에 와서 우산을 쓰고 약속 장소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아침에 로비에서 만난 노숙자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거절했던 거라고 나름의 변명을 만들어붙였다.
친절이 의심받는 시대다. 만약 우산이 두 개 있었다면 나라도 별 사심 없이 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친절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언젠가는 횡단보도 앞에서 눈 푸른 외국인 여자가 한국말로 "날씨가 참 더워요."하길래 "그렇지요." 맞장구쳐주다가 선교단체에 끌려갈 뻔한 적이 있다. 또 언젠가는 자판기에서 커피 빼먹으려는데 동전이 100원 모자란다는 할아버지에게 100원짜리 건넸다가 기왕 줄거면 천원짜리 내놓으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그냥 친절'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미안하고 서글프다.

 

덧글

  • 미서니 2019/03/27 13:09 # 삭제 답글

    공감합니다~~~
  • 긴호흡 2019/03/27 15:39 # 삭제 답글

    부산 여행 갔을 때 왜들 그렇게 저한테 길도 묻고, 다른 것도 많이 물어보시던지요...;;; 내가 친절하게 생겼나, 만만하게 생겼나, 한참 고민하게 만들더라고요...ㅎㅎ
  • 달디단 2019/03/28 10:34 # 삭제 답글

    모르는 사람이 말 걸거나 친절을 베풀 때 경계하고 의심하는 게 정상인 사회가 되어버렸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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