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읽고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나무의철학

후배가 요 몇년 동안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며 추천했다. 그런 추천을 잘 하는 애가 아니었으므로, 읽었다. 초반에 화재가 일어나는데, 그 화재를 보며 말하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생각들이 파편적으로 나와 이야기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고, 미아와 펄의 떠돌이 같은 삶, 특히 미아가 찍는 사진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마치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에 나왔던 소피 칼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클리블랜드 셰이커하이츠에 사는 리처드슨네 가족은 변호사 아빠, 기자 엄마, 렉시, 트립, 무디, 이지 남매로 이루어진 다복한 가정이다. 리처드슨네 소유의 셋집에 미아와 펄 모녀가 이사온다. 미아는 온갖 허드렛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지만 사진을 찍는 예술가다. 리처드슨 부인은 미아에게 힘들게 여러 군데서 일하지 말고 자기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예술하라고 제안한다. 그 덕분에 펄은 리처드슨네 아이들과 형제처럼 친해지고, 무디는 첫눈에 반한 펄과 단짝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 미술관에 견학갔던 펄과 무디는 엄마(미아)가 갓난쟁이 펄을 안고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유명 사진작가 폴린 호손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아빠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떠도는 삶을 사는지 몰랐던 무디는 엄마에게 그 사진에 관해 물어보지만 답을 듣지 못한다. 
한편 소방서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입양하기로 한 리처드슨 부인의 절친 매컬러 부부에게 갓난아기의 친모가 나타난다. 중국계 이민자 베베가 1년 전엔 형편이 어려워 아기를 버렸지만 이제는 아기를 양육할 수 있으니 돌려달라 하고, 매컬러 부부는 이미 1년 동안 아기와 살았기 때문에 정이 들어 안된다고 한다. 이 일은 소송까지 간다. 리처드슨 부인은 당연히 매컬러 부인의 편이고, 미아는 함께 일한 베베의 편에 서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는데....

초반에 방을 계약을 하며 리처드슨 부인은 "하지만 당신은 세 들어 사는 거니까 아무런 부담 없이 모든 혜택을 얻는 거죠."라고 이야기한다. 이때 쎄한 느낌이 뒷통수를 훑는다. 있는 사람들이란 이딴 식으로 생각하는 건가? 자기가 시혜를 베푸는 이 말투는 뭐지? 했는데, 역시나 후반부를 보면 캐릭터의 씨앗을 잘 뿌려놓은 케이스였다.
나는 미아에게 매혹되었지만, 결국 나의 감정을 움직인 건 리처드슨 부인이었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거친 일에 뛰어들기는 싫고, 단정하게 칼마감하여 원고를 넘기는 모습에서 지금 내 모습을 본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을 이야기할 때 당연히 기른 정이고, 그게 PC한 거라 생각했던 나는 이 이야기의 베베와 메이링을 읽으며, 생각하지 못하고 책에서 배운대로만 입력된 나를 본다. 친절하고 배려넘치는 태도 아래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못보는 리처드슨 부인을 보며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닮아 있기에 불쌍하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가장 연민했던 대상은 펄이다. 아무리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예술을 위해, 혹은 낳은 죄 때문에 평생을 떠돌아야 하는 그 아이의 고달픔. 그러나 초등학교 5군데를 전학다녔던 내 유년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고달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게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생활양식이 되기 때문에 안된 거지. 펄과 이지가 바뀌어 태어났다면 좀 더 좋았을까?
결국 이 소설은 책날개에 써있는 대로 '위험을 막으려고 세운 규칙들을 맹신하면 더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설이다. 그 위험이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처드슨 부인은 패했다. 베베가 메이링을 데리고 광저우로 가버렸을 때 어쩐지 통쾌했고 (법의 심판은 기득권의 방법이라는 것. 기득권이 아닌 사람들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 미아가 네 형제들과 부인에게 남긴 예술작품은 꼼꼼하고 우아하고 섬뜩했다. 
규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을 깨는 사람에겐. 

밑줄긋기
55 _ 기념품의 바로 그 시시하다는 점이 불안을 없애준다. 머물러 살 작정이 아니라면 키웨스트섬에서 조각된 조개껍데기나 CN타워의 축소 모형이나 마서즈 빈야드의 모래가 든 손가락 크기만 한 병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00 _ 하지만 인물 사진이라는 건 사람들이 보이고 싶어 하는 대로 찍어줘야 하는데 저는 제가 보는 방식대로 찍는 걸 좋아해서요. 결국 양쪽 모두 실망하게 될 거예요.
104 _ 사실 거절은 상황을 악화시켜 악감정에 이르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선한 행동으로 믿고 그것을 행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보통 그들을 만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아는 알았다.
234 _ 새것을 위해 길을 내려면 헌것을 태워버려야 하나?
235 _ 평생에 걸쳐 해온 실용적이고 편안한 사고가 두껍고 무거운 담요처럼 엘리나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불꽃을 내리덮었다.
269 _ 인터뷰 대상자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 때로는 걷기 싫어하는 큰 암소를 산책시키는 일과 같다는 것을 부인은 수년에 걸친 경험으로 터득했다. 그런 경우에는 암소가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믿게 하면서 암소를 올바른 길로 돌려놓아야 했다. 
375 _ 어느 달에 집세를 모두 지불하고 나니 식료품을 사고 전기세를 낼 돈이 모자랐다. 배고픔과 암흑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407 _ 깊고 맑은 호수로 알고 뛰어들었다가 그것이 무릎까지 차는 얕은 연못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했나? 그래, 일어섰다. 진흙이 묻은 무릎을 씻고 진창에서 발을 빼냈다. 그 뒤에는 더욱 조심했다. 그때부터 무디는 세상이 예상보다 작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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