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읽고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 민음사 

요즘 체육인으로 거듭 나고 있는 입장(ㅋㅋ)에서 이 책을 읽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축구하는 여자라니! 
근데 엄청 많은 여자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축구건 여자축구건 조기축구건 월드컵이건 하여간 축구를 좋아해본 적은 태어난 이래 단 한번도 없고, 4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월드컵 시즌에는 TV에 볼 게 없어 TV를 끄고 책을 읽는 내가 여자축구에 관한 책을 비실비실 웃으며 다 읽었다. 김혼비는 진짜 닉혼비처럼 글을 쓴다. 한구절 한구절이 재미와 개그의 향연이라 넘나 재밌었다. 
축구에 문외한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알게 된 게 너무 많다. 축구란 그저 골넣고 득점하는 걸 보는 종목이 아니라 공을 골대로 몰아가는 중에 생기는 공간과 패스를 보는 재미가 팔할이라는 것, 프로 구단 아닌 친목 축구회에선 경기할 때마다 감독이 아무것도 안바라고 그거 길게 롱패스만 하라고 한다는 것, 우리나라 WK리그 경기는 관람비가 없다는 것(돈 내고 보러 가는 사람이 없으니 공짜로라도 보러 오시라는 거.ㅠ.ㅠ), 현대제철 여자축구팀이 강팀이라는 것, 육아 때문에 여자축구회의 주축은 40~50대라는 것, 여자축구회에 들면 할아버지들과 뻔질나게 경기한다는 것, 여자선수는 가끔 남자축구회에서 뛰기도 한다는 것 등등등.
내가 특히 빡쳤던 부분은 국가대표 출신 여자선수 앞에서 맨스플레인을 시전하는 개발들!!! 대화를 읽는데, 진심 뒷골이 쫙쫙 당겼다. 지나 잘하지 저 설명충들은 뭐야 싶다가, 후반전에서 여자선수들이 그 아저씨들 앞에 왔다갔다 약올리며 아주 느리고 우아하게 골을 먹일 때,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다. 나이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울었다. 김나래 선수가 부상당해 실려나가는 장면에서였나, 고깃집에서 일하는 미숙언니가 '나 축구하는 여자다 이거야' 할 때였나. 울컥한 구절들은 부지기수였다. 세상 제일 불쌍하다는 K리그에 비교해도 부러운 것 투성이인 WK리그. 훌쩍.
반성한 부분도 있었다. "남자들한테 인기 끌려고 축구하지?"라고 묻는 남자들 얘기에 뜨끔했다. '우리 결혼할래요'에 나왔던 이시영이 피규어 모으고 조립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남자들한테 인기 끌려고 그러는 거 아냐 했던 게 나다. -.-;; 나중에 알고보니 이시영은 영화 때문에 배웠던 복싱에 푹 빠져 시합에도 나갔고, 조깅도 엄청 열심히 하는 스포츠인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해서. 
책 마지막 문장은 이거다.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이 작가 생각이 넘나 마음에 든다. 내 말이!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거 아닌가! 그리고 이 말을 빌자면 이 책 정말 기절한다. ㅋㅋㅋ <마녀체력>도 재밌더만 팀 경기라 그런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더 재밌었다. 오죽하면 이거 읽고 나도 잠깐 <카포에이라 하는 남친 만나기> 같은 책을 써볼까 했다니까.

밑줄긋기
8 _ 당시 운동장을 누비던 많은 남자들이 자라서 조기 축구를 하게 되었다면 당시 운동장을 등졌던 많은 여자들은 축구와 조기 이별을 했던 것이다. 
16 _ 하지만 난 고독과 싸운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편하고 조용한 애하고 대체 왜 싸우지?
48 _ "여자가 축구 같은 걸 너무 아는 척하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서 싫어해. 남자 기도 좀 세워 줘야지." 같은 말과, 이와 정반대되는 "남자한테 인기 얻으려고 축구 보는 거지?" 같은 말을 동시에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제발 의견 통일이라도 좀 해 줬으면 좋겠다.
87 _ 우리 팀 축구 경기가 한 권의 책이었다면 두 트리오가 월패스로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장면들마다 책장 한 귀퉁이를 접어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펴서 보고 또 봤을 것이다.
89 _ 축구팀에 들어와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축구인들끼리는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가장 먼저 패스에 민감해진다는 점이다.
126 _ 그건 검은색 물감이 묻은 두꺼운 붓으로 도화지를 슥슥 그은 자리마다 흰 크레파스로 그려 놓은 밑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비슷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실수들이 슥슥 지나갈 때마다 그 밑에 숨어 있던 서로를 향한 마음이 공격이나 다툼의 형태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번 그렇게 붓질이 시작되면 도화지 귀퉁이 어딘가에 그려진 채 몇 년간 묵어있던 밑그림까지도 선명하게 드러나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 다투기도 했다.
151 _ 일단 오늘부터 운동장을 서른 바퀴씩 뛰세요. 처음에는 힘들어서 한번에 서른 바퀴 못 뛸 거예요. 한 열 번은 멈추어야 할 텐데, 그렇게 멈추면서라도 무조건 서른 바퀴를 채우는 거예요. 그렇게 1년을 꾸준히 뛰어 보세요. 그래서 서른 바퀴가 비교적 문제없을 정도의 체력이 되잖아요? 그럼 기술들이 다 따라붙게 되어 있어요."
152 _ 무엇보다 체력이 있어야 연습도 많이 할 수 있고 연습을 많이 해야 실력이 는다.
229 _ 뻥 축구의 슬픈 점은 뻥 축구가 아니면 다른 답이 없는 약팀일수록 그 뻥 축구조차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248 _ '야 너희 내가 그냥 보통 식당 이모인 줄 알겠지만 알고 보면 나 축구하는 여자다 이거야!'
278 _ 일 나가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어떻게든 일상에 축구를 밀어 넣는 이 여정 자체가 어떻게든 골대 안으로 골을 밀어 넣어야 하는 하나의 축구 경기다. 기울어진 축구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걸 잘 알기에 모두들 최대한 모두의 일상에 축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패스를 몰아주고 공간을 터 주고 리듬을 맞춰준다. 여기서 우리는 한 팀이다.


덧글

  • 2019/04/19 06: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미니벨 2019/04/20 10:52 # 답글

    이 책 재밌죠. 축구는 안 좋아하는데 봐야하나 살짝 갈등도 했어요. 하지만 야구만으로 힘들어서 포기했어요. 그놈의 잘난 척하는 것들 왜 그러나 몰라요.
  • 프리고로타 2019/04/22 08:59 # 답글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전 작년 러시아월드컵 직후에 읽어서 더 흥미진진했어요.
  • 희야 2019/04/25 10:29 # 삭제 답글

    오 이책 빌려서보기시작했는데 넘 재미있어요ㅎ 어제 간만에 책보다가 큰소리내면서 웃었어요
  • 해리 2019/04/25 13:07 # 삭제 답글

    이 책은 현재 '재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널리 적극적으로 읽혀야 하는 매우 이로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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