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읽고

여행의 이유
김영하 | 문학동네

<살인자의 기억법>이 나왔을 때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가 필요했다는 식의 문구가 띠지에 적혀 있었다. 그걸 보며 기대했다가, 소설 읽고 엄청 실망했었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의 띠지에 '이 책을 쓰는 데 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고 적혀 있어 픽 콧웃음이 났다. 문학동네는 이런 카피를 좋아하나보다. 계속 밀다니.
그런데 다행히도 <살인자의 기억법>만큼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 소설을 쓰기 위해 전 생애가 필요했다는 건 내 입장에선 (개)구라였지만, 이번 책을 쓰기 위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 할 수 있다. 
말랑말랑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고 여행의 어떤 측면들에 대해 깊게 파고 들어가 사색한 내용들을 써놓아 마음에 들었다. 그 생각들 중에는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동의가 안되는 것도 있다.

몇년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김영하도 늙고 있다. 과거를 회고조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운동권 학생으로 대기업 후원의 중국 여행을 갔고, 거기서 북경대 학생 기숙사에 들어간 이야기 같은 건 전작주의자인 내 입장에서도 처음 보는 이야기다. 이후 안형사의 전화로 도피생활을 했고 대학원 시험 친 뒤 잡혀갔다는 것도.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을만큼 그는 자유로워졌고 아마도 딱 그만큼 늙었다는 뜻이겠지. (내가 이제와 90년대 연예계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도 어쩌면 늙어서 그런 건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왔다.)

전국 각지를 6번이나 전학 다닌 그처럼, 나도 국민학교를 5군데 다녔다. 그래서 오래된 관계가 잘 없고, 졸업을 하거나 이직을 하면 이 전의 관계는 끊긴다. 그게 나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언제나 자격지심이 있었다. 오래된 관계를 돌보지 못한다는. 그래서 그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되어 많이 위안이 되었다. 다만 그래서 그는 하얀 시트가 깔린 호텔방에서 안정을 느낀다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 같은 유년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받아들여 영향받는 부분은 다른 것이다.
여행이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경험이라고 쓴 부분도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절반 정도는 한국의 잘 나가는 남자라는 포지션이기에 크게 느끼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가서 남자들은 불안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여자들은 해방감이나 자유를 더 크게 느낀다.
알쓸신잡에 대해 부분 부분의 불완전한 여행을 몇 단계에 걸쳐 보다가 나중에 통합해 보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가장 완전체의 여행을 보는 사람은 시청자라는 것도 신선한 관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예들에게 힘든 여행을 시키고, 자기는 방안 혹은 배 안에 앉아 그 일들을 보고받아 책만 썼던 옛 귀족들의 현현이 시청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내에게 여행 시키고, 남편이 이스터섬에 대한 글을 남긴 것에 대해 남자의 행위를 자기 속에 타자의 관점을 가진다는 식으로 대단하게 해석했던 바야르는 좀 웃겼다. '자기 속에서 타자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유사 이래 모든 여자들이 평생에 걸쳐 해온 것이다. 그걸 뭘 그렇게 대단하게 해석하시는지. 그리고 나는 아무리 타자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탈여행을 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여행은 그 땅을 밟고 보고 경험했던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책이 지금 거의 대부분의 인터넷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라는 사실이다. 간혹 문학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전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이제 김영하는 거물이 되었구나. ㅠ.ㅠ 


밑줄긋기
23 _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51 _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147 _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148 _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179 _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196 _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 있더라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덧글

  • J 2019/05/18 20:08 # 삭제 답글

    고위급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좀 더 편하게 운동권 과거를 이야기하는거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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