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읽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 사계절

내가 김원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건 한겨레의 칼럼 한편 덕분이다. '혐오의 말과 어깨동무'라는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0197.html
너무 공감되는 얘기라서 이 분이 썼다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도 리스트에 넣어뒀다. 지난해 말, 자신들의 올해의 책으로 이 책을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사기까지 했는데, 역시나 사놓은 책은 제일 늦게 읽게되는 원리에 따라 내내 뒤로 밀리다가 도서관 갈 시간이 없어진 지난주에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첫 챕터부터 가슴을 쿵 때리는 주제로 시작한다. 
'잘못된 삶 소송'이라고 아는가? 나는 처음 들어봤다. 태아시절 검사할 때 정상이라고 해서 낳았는데, 낳아보니 장애인이거나 불치병에 걸려있는 자식을 낳은 부모들이 병원을 상대로 거는 소송이다. 때로는 소송 당사자가 장애인일 때도 있다. 장애인이 '잘못된 삶(Wrong Life)'인가?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애인을 가장 잘 알고 잘 돕는 부모조차도 사실은 장애인이 아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들이 그들을 울리고, 부모를 죄책감으로 몰아넣는다. 읽는데 먹먹했다.
장애인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장착해야 하는 품격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저자 자체가 휠체어를 몰고 가다 고꾸라질뻔 했을 때 "방금 각도 좋았음?"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겪고 단련이 되어야 하는지 가늠이 됐다. 장애인 친구가 같이 갈수 없으니 나도 놀러 못가겠다는 마음을 "나 피부 관리해야 되거든."하는 농담으로 받아친 친구의 품격, 또 남들은 몰라줘도 우리끼리는 아는 우리만의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들. 내가 몰랐던, 아니 알려고 생각도 안해본 그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수화가 그 언어체계 자체로 남다른 언어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드 닥터 하우스에서 저신장 장애 엄마의 저신장 장애 딸이 알고보니 뇌종양을 제거하면 보통 사람처럼 클 수 있다는데도 저신장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회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안타깝고, 혼란스럽고, 한편으로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나의 잣대를 의심해보게 만들었다. 
이야기가 디보티즘에 오면 진짜 혼란스럽다. 절단된 신체에 사랑을 느끼는 디보티즘은 변태인가 사랑인가. 유난히 남자 팔뚝에 집착하는 여자나, 허벅지 굵은 여자 사랑하는 남자와 디보티즘은 어떻게 다른가 등등. 이 책은 매 장이,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관한 것이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논의가 매 페이지 쏟아져나왔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어떤 일들이 큰 분기점이 됐는지는 알고 있지만 장애인 인권 운동에서 1984년 교통 이동권을 주장하며 자살한 김순석의 죽음이 분기점이 됐다는 건 처음 알았다. 원하는 것보다 스스로 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라던, 연출가의 변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어공주가 지느러미 옷을 찢어버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건 살아있는 생생한 이야기다. 공자왈 맹자왈하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일생에 몇 명 만나지 않았던 장애인들을 다 떠올렸다. 그 중에는 감동받았던 사람도 있고, 내가 상처준 사람도 있으며, 철없던 나를 정신차리게 만들어준 사람도 있었다. 표피적인 장애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복잡한 마음의 경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다. 
이 책을 하반기 독서모임에서 발제하고 싶다는 마음 반, 내가 과연 이 책의 논의를 어떻게 끌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된다는 마음이 반이다. 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랬다. 이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갈팡질팡 왔다갔다 하며 읽었다. 인간과 삶의 복잡함에 놀라며.

밑줄긋기
87 _ 만약 자신이 장애인이 되는 대가로 평화시장 여공들의 근로 조건이 개선된다면 전태일은 죽음 대신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세연과 미시마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거의 모든 장애는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아름다운 공연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실존이란 넘어지거나 뒤틀리고, 용변을 참느라 고생하고, 허리 통증이나 방광염에 시달리고, 어색한 시선을 받고,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가장 미적으로 마감하고 싶은 공연자들에게 이는 죽음보다 못한 삶일 것이다. (여기서 정세연은 장강명의 <표백>의 주인공, 미시마는 일본의 탐미주의작가 미시마 유키오)
115 _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 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124 _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217 _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결정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말은 흐르고 흘러 눈 앞에 등장하고, 몸에 감촉되는 '물질'이 된다.
261 _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267 _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284 _ "(가지기를) 원하는 것보다 스스로 되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더 주체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295 _ 부모가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정체성의 인정)은 때로 충돌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고통이나 역경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잘못된 삶'을 아예 살지 않거나 가능하면 그런 삶과 거리를 둔 채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반면 온전하게 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된 삶'이라는 규정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는 더 '어려운' 길(역경)일 수 있다.
305 _ 장애를 가진 내가 잘못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우리는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자신을 보듬고 돌보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종종 실패한다.



덧글

  • 긴호흡 2019/07/26 20:25 # 삭제 답글

    이것도 좀 조심스러운 말이지만...장애에 관한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부담, 긴장, 경계 혹은 두려움(?) 같은 그런 마음들을 덜어놓을 수 있는 책인 것 같기도 해요. 책에서 언급했던 이런저런 책 중에서 몇 권 골라서 읽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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