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읽고

여자들의 등산일기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비채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가 드디어 누군가 죽어나가지 않는 소설을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살인사건이 없는 미나토 가나에는 앙꼬없는 찐빵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읽어보니 살인 소재가 아니라도 그녀의 소설은 그녀의 소설이었다. 살인이 있었던 그녀의 소설들도 <고백>이 워낙 쎄서 그런지 그 이후의 소설은 다 비슷비슷했다. 이 소설도 구조가 비슷하다. 일본 내의 여러 산과 뉴질랜드의 산까지 나오고, 각 산마다 다른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모두들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 이야기 주인공의 친구라거나, 이 산에 올라왔던 주변 인물이 저 산에서는 주인공인 식이다. 아마 한국 사람 이름이었다면 대번에 다 알았을텐데, 일본 사람 이름이라 게다가 성과 이름을 따로 쓰는지라 헛갈리고 못 알아본 부분도 있지 싶다. 
나는 좀 이런 구조에 약한 것 같다. 딱히 이런 구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다가 도저히 다 못읽고 덮었는데, 그 소설도 딱 이런 구조였다. 여기서 주인공이 저기서 배경인물이 되는 식인데, 그걸 굳이 집중해서 읽어 찾아내고 싶지 않았고, 찾아낸다고 해서 즐거움이나 쾌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쓰는 사람의 노력은 드는데, 읽는 나에게는 별 재미가 없는 구조다. 
그나마 그 구조를 잘 이용한 트릭이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 실려있다.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데 교묘한 트릭이 숨어있다. 나는 유즈키라는 이름을 보고서, 이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 전체 중에는 백화점의 입사동기 삼총사 중 한명이 빠지고 별로 친하지 않은 두 명이 산에 갔다가 (한 명은 결혼을 앞두고 불안한 상태, 한 명은 불륜녀) 친해져 내려오자, 그 다음 회에서 삼총사 중 빠진 한 명이 그 둘이 친해진 것에 묘한 질투심을 품고 있다가, 그들을 이기려고 후지산에 가고 싶어하는데, 그 마음을 안 연극배우 남자친구가 후지산이 아니라 후지산이 잘 보이는 산에 데려간 이야기가 좋았다. 연극배우가 "후지산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해발 몇미터에 목매고 후지산 정상만을 목표로 올라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것이 너무나 속상했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푸른 하늘 아래 경주 벚꽃을 보고서도 방탄 뮤비에 나온 흐린 하늘이 아니라 아쉽다는 누구 때문에 속상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아마도 경주 살면서 봄날 푸른 하늘 아래 벚꽃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겠지.
홋카이도의 산을 오르던, 사이 별로인 자매 이야기도 재밌었다. 한쪽은 갑자기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당한 언니, 한쪽은 아버지 양파 농사를 도우면서 아버지 연금에 빌붙어 사는 동생. 동생의 오해와 동생의 한 마디 덕에 너무 쉽게 해결되어 버린 언니의 고민. 또 거품경제 끝물을 살다 이제 40대가 된 여자가 자신을 초보자이자 여신처럼 떠받들던 남자랑 등산하다가 실은 이 모든 산을 다 다녀봤고 등산동호회 출신이라고 밝히는 이야기도 재밌었다.
 
어쨌든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느꼈던 건, 일본은 왜 이렇게 정해진 답 같은 게 많을까? 하는 점이었다. 거듭 나오는 등산화나 아웃도어 브랜드 같은 건 PPL이라 치고 넘어갔지만, 모든 회에서 사람들이 다 초콜릿을 먹고, 꼭 물을 2리터씩 마시고, 마치 그게 정해놓은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숨이 막혔다. 누구는 오이를 가져가도 되고, 누구는 사탕을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왜들 그렇게 하나같이 초콜릿에 드립커피에 물 2리터를 공식처럼 먹을까? '여자들의 등산일기' 사이트에서 그렇게 하라고 권했대서 그렇게까지 따를 필요가 있나? 참 답답했다. 

밑줄긋기
136 _ 나에게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말을 거듭하고 사진을 늘어놓아도 산에서 본 풍경을 백 퍼센트 지상에서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동을 공유하고 싶은 상대가 생긴다면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
243 _ 나는 그 둘이 따로따로 돌아오면 어떡하냐고 내가 걱정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실은 그렇게 되기를 내심 기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312 _ 정상에 도착해서 그곳을 즐길 여유가 남아 있을지 없을지 모를 사람에게 무책임하게 등산을 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정상은 골이 아니고 그 뒤에 내려가는 작업도 기다리고 있다.
363 _ 누군가가 같이 하자고 하기를 기다린다.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말을 걸어오면 기쁜 주제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니 어느 회사에도 붙을 리가 없다. 결혼도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덧글

  • 좀좀이 2019/08/12 14:41 # 삭제 답글

    후지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후지산이 아니라 후지산이 잘 보이는 산에 데려간다는 생각 멋지네요 ㅎㅎ
  • 이요 2019/08/12 17:33 #

    그죠? 그 작품 좋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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