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읽고

디디의 우산
황정은 | 창비

한국 소설가 50인에게 올해의 한국 소설을 꼽아달라 했더니 이 책을 첫손에 꼽았다고 한다. 이 기사가 나오기 전에도 나는 이미 한번 이 책을 빌렸다가 반납한 적이 있다. d와 dd라는 이름도 아니고 이니셜도 아닌 주인공들이 등장했을 때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고, 앞의 한두페이지를 읽는데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몇페이지 읽고 갖다줘버렸다. 
그런데 한국 소설가들이 첫 손에 꼽은 소설이라니 대체 무엇이 있기에? 싶어서 다시 한번 읽기에 도전했다. 

간혹 한국소설 중에 주인공 이름을 영어 이니셜로 대체한 소설들이 있어왔다. 나는 질색을 하는 편인데, 왜냐하면 이름만으로 간편하게 가능했던 남녀와 세대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읽는데 그만큼 공력이 더 든다. 최근에는 또 의도적으로 남녀의 이름이 중성적이거나 아예 뒤바꿔 쓰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느낌으로 이 연작소설집의 첫편 'd'를 읽었고, 읽으면서 어쩌면 작가는 d와 dd의 이름으로 유추되는 표상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즉, 작은 이니셜로 표기되는 익명의 누군가가 서서히 개성있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떠오르는데, d라는 이니셜이 기능하는 바가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고립된 d가 누군가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읽었다. 그래서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동해루 사장님이 "로젠 여기 와 있네. 뭐 해 여기서."하던 부분이다. 그 전까지도 d는 내가 저 아저씨를 어떻게 알지? 저 아저씨는 나를 어떻게 안다고 하지? 회의했는데, 동해루 사장님이 '로젠'이라고 정확히 너를 안다는 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해버리는 바람에 그 모든 의심과 회의가 무너질뿐 아니라 그게 별 쓸데없는 질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세운상가 수리실 창고에서 음악을 듣는 한 인간이 된다. 

'd'가 그래도 소설 같았다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소설 같지도 않았다. 그냥 누군가의 일기나 자료조사 노트 같았다. 신문 기사와 사건들이 자료조사한 것처럼 두서없이 나열될 때는 "이거 뭐지?"하면서 읽었다. 뭔가를 길게 쓰다가 말줄임표와 함께 '그만 하자'로 끝내는 문장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건 이다혜 기자가 인스타에서 자주 쓰는 문장이 아닌가. 이런 문장이 젊은 여성작가들이 쓰는 어떤 트렌디한 문체인가 싶기도 했다. 이런 모호한, 자료 조사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이 글에 나는 요소요소 공감하고 옛기억을 떠올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연세대 사태, 이웅평 귀순, 생리, 아버지의 가부장과 무능, 회사, 집회 등등...
소설 내내 상식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던, 상식이란 얼마나 생각없고 지성없고 습관적인가에 대해 설파하던 화자는 결국 서수경이 죽어도 나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팩트를 발설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일 살아돌아오는 그가 애틋하는 감정을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자주 떠올렸고, 또 만약 지금 나와 남친 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역시 연락은 서로에게 닿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자주 떠올렸다.
나는 여기 나오는 사람들 중 김소리가 제일 좋았는데, 그녀가 학교 자퇴해버리는 언니에게 재수없었다고 할 때는 극 공감했고, 세월호 이야기 그만하라고 할 때는 배우게 되었다, '그만하라'는 말 뒤의 사람들도 다 다르다는 것을. 집회에 나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기억하려는 자는, 실은 매일 아이의 흔적을 치우며 떠올리려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보다 덜 힘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도 끝내 앞편과 뒷편이 왜 장편소설의 형태로 묶였는지는 절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소설가들이 좋아할만 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처음에는 일기나 자료조사 같아서 나도 이렇게는 쓸 수 있겠다 만만했던 이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 때는 아무나 이렇게 쓸 수는 없겠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바뀐다.


밑줄긋기
69 _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136 _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살림이 너무 가난해 그녀를 친척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아들은 두고 딸을 보냈어. 가난 탓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계집아이였기 때문이야. 
145 _ 세상에 그거 한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225 _ 너희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했다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의 용서가... 우리에겐 그의 용서가 이미 필요하지 않다. 그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과, 알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257 _ 서수경이 죽어도 내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서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
265 _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306 _ 모두가 좋은 얼굴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분란을 만드는 일을 거리끼는 마음이 내게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그 팻말 앞을 그냥 지나쳐 왔는데 오늘 밤 집에 돌아가서 이 일을 계속 생각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내가 그 말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말하자면 그걸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꾸 할 것 같다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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