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여행의 파편들 살고

작년 6월에 여행 다녀오고 여행기를 제대로 못썼다. 바로 취직을 한데다 바쁠 때는 5잡을, 한가할 때도 최소 3잡을 하느라고 여행사진 정리하고 여행기 올릴 시간이 없었다. 그랬더니 여행의 기억도 희미해졌다. 역시 기록을 해야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그래서 뒤늦게 여행사진을 훑어보며 그 여행에서 남은 잔상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정리해볼까 한다. 오늘은 그 중 첫 여행지인 헬싱키.
핀에어를 타고 갔는데, 헬싱키 공항이 인상적이었다. 크지 않은데도 원목과 곡선 등을 이용해 딱 북유럽풍이라고 할만한 인테리어를 보여준다. 대리석과 돌을 자연스러운 굴곡을 살려 다듬어 무심하게 툭툭 놓고, 끊임없이 영상이 흘러가는 첨단 스크린 마저도 구불구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놨다. 원목 바닥도 마음에 들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은 공사 중이었고, 우리는 시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공사 중인 공항의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다가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가 모여있는 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왼쪽 제일 아래쪽의 노란 브로슈어 중에는 놀랍게도 한국어판이 있다. 이거 하나만 들고 다니면 뚜벅이 여행족들이 이틀 간 헬싱키의 곳곳을 테마 여행할 수 있다. 강추! 여기서 맵과 안내서를 챙겨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헬싱키 시내로 나간다.
헬싱키의 첫인상을 사진 한장으로 대신한다면 바로 이 사진이다. 공항버스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렇게 쭉쭉 뻗은 침엽수와 자작나무들을 내내 볼 수 있다. 여행 전에 막연히 떠올렸던 헬싱키에 대한 상상이, 이렇게 현실로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정돈된 나무와 숲, 초록초록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헬싱키는.
고속도로의 침엽수와 자작나무 뿐만 아니라 시내에도 나무를 원없이 볼 수 있다. 이런 공원이 도처에 있다. 사람들이 잔디밭에 아무렇지 않게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고, 공원은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간혹 시내가 아닌 곳의 공원은 좀 으슥하기도 하지만. 시내의 공원 주변에는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고, 길 하나 건너면 상가가 연결되어 있다. 서울의 연트럴파크가 이렇게 우거지려면 20년쯤 걸릴까?
다리 난간, 건물 축대, 대문 입구 등에 올빼미나 사람 얼굴 모양의 장식이 되어 있다. 그 장식의 모양이 건물마다 다 달라서 발견할 때마다 사진을 찍곤 했다. 이 다리는 우리 숙소에서 시내로 나갈 때 항상 건너다녔던 곳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나흘 동안 단 한번도 문 연 것을 본 적이 없던 구제숍이 나온다. 구제 좋아하는 도빅은 맨날 그 쇼윈도우 앞에서 먹어보지도 못할 감을 쳐다보는 심정으로 발길을 멈추곤 했지. 
헬싱키에서 가장 자주 갔던 곳이라면 이곳이 아닐까? 저 하얀 헬싱키 대성당은 자꾸 하코다테를 떠올리게 했다. 성당 아래 계단에는 젊은이들이 앉아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아이러브헬싱키라는 간판도 서있어서 그 앞에서 관광객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이 계단 아래에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숙소에서 전차를 타고 이곳에 내린다. 여기서부턴 어느 골목으로 걸어도 재밌고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도 코 앞에 있어 걸어 갈 수 있다.
아테나움 미술관에 갔다. 테마파크처럼 입장권 스티커를 붙여준다. 그 스티커마저도 예쁘다.
뭉크의 또다른 그림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자화상 기획전 코너에는 이렇게 셀피 찍는 코너(거울)도 마련되어 있었다.
뭉크의 대형 그림 멋졌다.
우와...이우환. 이우환을 헬싱키 미술관에서 만날 줄이야!
항상 큰 화폭의 그림만 보다가 이토록 아담한 그림이라니!
이곳은 헬싱키 중앙역. 아치형의 역은 유럽에서 자주봤지만, 옆에 지구인지 공인지 뭔지를 들고 있는 거대한 거인상이 둘이나 나란히 (양 편에 있으니 도합 4인이다) 서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퍽 인상적이었다. 가보려다 못가본 부다페스트의 메멘토공원에도 저런 조각들이 있다고 했는데...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공산권의 느낌도 난다. 민트색과 회갈색의 조화도 그렇고, 인상적인 건물이다.
헬싱키 중앙역 맞은편에 아테나움 미술관이 있다. 북유럽 한 복판에서 한자(아름다울 미)가 대형걸개로 걸려있는게 이색적으로 찍어봤다. 마침 전차도 지나가길래. 중앙역 앞이라 넓은 도로에 버스, 전차, 자전거, 사람이 혼재했다.
이 날은 헬싱키 외곽의 포로부라는 마을로 여행가는 날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예약해서 탄 버스에는 와이파이가 잡혔고, 마침 이날 서울에선 극본 공모전 시상식이 열렸다. 여행 간다고 시상식에 빠진 나는 와이파이가 잡히는 덕분에 수상작가들 단톡방에 초대도 되고, 피디로부터 인턴작가 오리엔테이션 자료도 받을 수 있었다. 해외로밍을 안해갔기 때문에, 만약 이날 이 버스를 안탔다면 밤에 숙소에 돌아와서야 문자폭탄을 맞았을테고, 대답없는 메아리에 인턴 계약도 못했을지 모른다. 
이날 여행은 전반적으로 별로였지만, 버스에서 와이파이가 잡혔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다행으로 남아있다.
카피도키아의 도자기 마을 같았던, 스페인의 엘 토보소 같았던, 영화세트장 같던 포로부 마을.
유럽에는 어디나 이런 급조된 영화세트장 같은 마을이 관광지 근처에 개발되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가짜같았지만, 이 교회는 진짜 같았다.
콘테이너를 몇층으로 쌓아놓은 이런 건물을 헬싱키 시내에서 종종 봤다.
현장 직원 숙소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런 것조차 넘나 깔끔하다. 
암석교회를 보고 나서 시벨리우스공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던 곳이다.
시내 윗쪽은 약간 느낌이 달랐다.
우리의 여행은 하지제의 자장 아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가는 길에 예쁜 도서관이 있었는데, 기뻐하면서 갔더니 하지제라 문이 닫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하지제가 그토록 대단한 행사인지 몰랐다. 이 예쁜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
여기서부터 시벨리우스 공원까지는 와.......계속 이런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어쩌면 헬싱키 중심가에서 떨어진 어느 호숫가 숲에서 우리는 이름모를 객이 되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인적도 드물고, 제대로 길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무리 구글맵을 돌려도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과연 이런 숲을 헤치고 가면 뭐가 나오긴 하는 건가 걱정에 걱정을 더하며 걸었다.
그리고 그 숲을 나오자, 호숫가의 카페가 보였다. 언니가 블로그에서 봤다며 시나몬롤이 맛있는 힙한 카페가 호숫가에 있다고 했을 때, 내가 상상한 건 최소 제주도의 몽상드애월이나 하다못해 서연의집 정도는 되는 카페였다. 그런데 이렇게 작고 소박한 가게라니... 그야말로 판자집이었다. 카페 이름은 레가토. 안에 자리가 없어 야외의 플라스틱 의자와 파라솔 자리에 앉았다. 계피빵이 맛있어서 소문이 난 건지, 이 근방에 커피 마실 데라고는 여기뿐이라서 그런 건지 줄이 길었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꽤 더운 날이었는데, 그 와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뭘 굽더라. 계속 연기와 냄새가 났다. 서울의 힙과 헬싱키의 힙은 참으로 달랐다. 

그리고 시벨리우스 공원의 조각. 여긴 무료 공원이라 그런지 관광버스가 줄줄이 도착해 관광객들을 내려놓았다. 대개가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다. 패키지 여행의 성지구나 싶었다.
오르간 통 같은 저 파이프 조각상 옆으로 시벨리우스 얼굴 조각상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42번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1만보 이상을 걸어서 유명하다는 벼룩시장에 도착했다. 분명히 구글맵에서는 여기가 맞다고 하는데, 벼룩시장은 어디 있나효? 주말에 열린다더니... 이것도 하지제 때문이었다!! 하지제, 그 놈의 하지제!! 하지제로 인해 이번주 벼룩시장은 쉰다고 한다. 이 너른 주차장의 저 하얀 구획 하나하나 마다 돗자리와 천막이 쳐져 벼룩시장이 흥성하게 열리고 있었야 하거늘...우리가 이 텅빈 주차장을 보기 위해 1만보를 행진하여 여기 왔단 말인가? ㅠ.ㅠ 이쯤 되니 뭔가 허탈해져서 조그만 일에도 배를 잡고 웃게 됐다. 반은 실성한 것 같기도. ㅎㅎ
아직도 '하그나스'하는 여성분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우리 숙소 앞 지하철 역 이름이 하그나스. 이들의 '하'는 우리의 '하'와 발음이 달라서 뭔가 아랫배 저 깊이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안으로 숨을 뱉어내는 것 같은 느낌의 '하'다. 시내에선 주로 전차를 탔지만, 멀리 갈 때나 공항 갈 때는 지하철.
하지제로 문을 닫은 핀란디아 홀.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역시 하지제로 문을 닫는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곳 테라스의 뷰가 그렇게 좋고, 카페도 전망이 그렇게 좋다던데....다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는 밖에서 건물만 구경했다. 흑.
헬싱키에선 자전거 타는 사람을 일상적으로 자주 볼 수 있다. 요즘은 서울도 따릉이의 등장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을 종종 보지만 핀란드는 훨씬 본격적이다. 핀란디아홀 근처는 도로도 잘 되어 있고 넓어서 그런지 자전거 타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헬멧과 보호장구도 잘 갖추고 탄다. 자전거 동호회처럼 보였던 라이더들.
핀란디아홀 맞은편의 현대미술관(물론 이곳도 하지제로 열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외부 계단을 통해 테라스에 올라갈 수는 있었다. 전시는 못봐도 주변 환경이 너무 좋고 푸르고 호수도 있어서 산책이 곧 힐링이었다. 구름마저 저렇게 예쁠 일인가! 미세먼지 심할 때마다 그립던 핀란드의 하늘.
시내 곳곳에서 자주 봤던 광고판. 백화점 광고 같은데,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라도 조금씩 다르다. 어떤 건 긴 머리 여자가 원피스를 입고 있고, 이건 단발머리 여자가 안경을 쓰고 있네. 닮았다느니 어쩌니 하다가 결국 이 일러스트녀와 같은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지제가 시작된 헬싱키를 떠나 빈으로 간다. 
공항 탑승구 쪽의 카페에서 내다본 풍경이다. 줄기 하얀 자작나무들이 빡빡한 숲이 보인다.


헬싱키는 디자인의 도시라 어느 한곳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침엽수만 빡빡할 거란 내 예상과 달리 초록초록 어딜 가도 푸른 자연이 보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핀란드 한번 갔다오면 왜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어영부영 헬싱키 여행기 끝! ^^



덧글

  • 진이 2020/02/14 23:33 # 삭제 답글

    어떻게 3박4일이 한번에 끝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톤으로 읽어줘)
  • 이요 2020/02/17 10:56 #

    다시 살펴보면 헬싱키는 숙소, 수오멘린나섬 등 포스팅이 몇 개 더 있어요. 한번에 끝낸 건 아니라고요.ㅎㅎ
  • augenauf 2020/02/15 07:55 # 삭제 답글

    요즘 제가 버닝해서 보고 있는 여성 미술가 그림들이 죄다 헬싱키 아테나움에 있는데요... 헉...
    올 여름에 거길 가서 꼭 원화들을 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제라니...... 설마 여름 내내 그런 건 아니겠지요?
  • 이요 2020/02/15 10:41 #

    추석 명절과 같은 거라 일주일쯤 하는 것 같아요. 6월말쯤이니까 알아보고 피해서 가세요.^^
  • 해리 2020/02/17 08:25 # 삭제 답글

    저기에 내가 있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음.
    어떻게 헬싱키를 이렇게 한번에 끝내니?ㅋㅋ(너무해너무해)
  • 이요 2020/02/17 10:56 #

    기대하시라, 곧 빈도 한번에 끝내주리라! ㅋㅋㅋ
  • 타마 2020/02/17 10:12 # 답글

    음식밸리용 (소근소근)
  • 이요 2020/02/17 10:55 #

    감사합니다. 고쳤어요. 이게 왜 음식밸리에 가 있을까요? ^^;; ㅎㅎㅎ
  • 앤님 2020/02/17 15:17 # 삭제 답글

    수풀을 헤치고 가셨다니.. 인상적이네요 가도가도 인적없는 그런덴가요
    여행기 보고 있으니 핀란드 미제사건 (보돔호수 살인사건)생각나요 .. 죄송합니다..남의 여행기에 살인사건ㅋㅋ
    근데 인적없는 수풀에 호숫가 얘기 읽으니 저도 모르게 생각이 나서 그만.. 숙연..
    유럽애들은 연령불문 자전거 전투적으로 타는 애들 많더라고요 저렇게 본격장비 마련해서 유럽 종주 ..그런거요 땅이 다 연결되있어서 그렇겠지만. 자전거 못타는 저로선 참 부러운 사진이네요 ㅎㅎ

    이제 노는 것도 흥미없고 (아무도 안믿지만) 이런 조용한데 가서 살고 싶은데. 돈없으면 안받아주겠죠? ㅜ빈 여행기도 기다릴게여
  • 이요 2020/02/17 15:23 #

    눼? 핀란드 미제사건? 헐...그거 알았더라면 저는 중간에 돌아가자고 했을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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