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베스트10 (2009~2019) 보고

뭔가를 검색하다 내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나의 영화 베스트 10 (1995~2008)
씨네21 15주년을 맞아 요즘의 SNS챌린지처럼 블로그에서 했던 건데, 그때로부터 또 10년이 흘렀다. 마침 나갈 일도 없고, 시간도 많아서 그 후 10년의 영화 베스트10을 선정해봤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개봉한 영화 중 나의 영화 베스트 10.

그랜토리노 (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어느 영화에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에게 믿고 보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모든 영화가 좋았지만, <그랜토리노>가 가장 좋았다. 
고집불통에 보수적이며 남과 불화하는 게 취미생활처럼 보이는 은퇴한 이 할아버지는 하루죙일 자신의 그랜토리노(자동차)를 애지중지 아끼고 닦아대는 게 일이다. 젊은이 무시, 인종차별, 이민자 혐오로 똘똘 뭉친 이 할아버지의 면박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구는 옆집 이민자 가족과 결국 정이 들고 그들에게 해꼬지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방법대로 설득하려다 비극으로 끝난다. 그렇게 죽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깜짝 놀랐고, 왈칵 눈물이 터졌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형상처럼 쓰러져 죽은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일각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수적이고, 백인남성중심주의라며 비판을 한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보수의 가치를 본다. 보수가 나쁜 게 아니라 제대로 되지 않은 보수가 보수인척 하는 게 나쁜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젊은 시절 자식들(특히 딸)에게 잘 하지 못한 아버지의 회한이 느껴지는데, 그걸 억지 신파로 풀어내지 않고, 그런 남자가 꼭 그럴 것만 같은 고집불통 행동을 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기 때문에 더욱 감동을 준다. 이 영화 외에도 <밀리언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설리>, <라스트 미션> 다 좋았다.



언애듀케이션 (2009)
론 쉐르픽 감독 | 캐리 멀리건, 피터 사스가드 출연

똘똘하고 영민한 여배우, 캐리 멀리건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영화. 이 영화 이후 나는 캐리 멀리건이 나온다고 하면 믿고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포스터도 그렇고, 제목도 아리송해서 전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당시 내가 열광하던 닉 혼비가 각색을 맡았다는 말을 듣고 뒤늦게 찾아본 영화다.
열일곱살의 똘똘하고 재능있는 여학생이 한 순간 부잣집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일탈하다가 결국 다시 제자리를 찾는 이야기인데, 가난한 엄마 아빠는 바보같고, 상류층의 매너와 태도는 품위있어 보이고, 나는 그 상류층에 어울리는 사람인데 어쩌다 이런 비천한 가정에 태어났나 생각하는 여학생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보는 내내 제니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저 유머와 위트있는 농담들, 매력있는 태도들, 차원이 다른 문화와 분위기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심지어 어른인 그녀의 부모들 역시 들떠서 딸의 등을 떠밀지 않았던가. 
이 영화의 가장 좋았던 점은 제니가 파멸에 이르렀을 때, 이 아이가 다른 길을 택하지 않고 학교로 돌아와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 그때 선생님이 "내가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아니?"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베스트 10 중에 이 영화를 빼고 다른 영화를 넣을까 많이 고민한 작품인데,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구는 똑똑한 젊은 여자가 어떤 경험을 하고 세상이 그렇게 녹록치 않음을 깨닫는 서사를 속수무책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그 대표적인 영화로 이 영화를 넣어봤다. 이 영화는 린 바버라는 저널리스트의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다. 영화 보고 세상을 다 알아버린 그녀는 이후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하는 리뷰를 썼더니, 누군가 실화 인물은 기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고 댓글을 달아준 기억이 난다.

인디에어 (2010)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 조지 클루니, 베라 파미가, 안나 켄드릭 출연

이 영화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함께 나의 직장영화 베스트2이면서, <위아영>과 함께 혼자 힙하게 잘 살아보겠다는 사람의 뒷통수를 치는 영화 베스트2에 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조지 클루니가 해고전문가로 나온다. '해고전문가라니? 그게 뭐지효?' 했던 나는, 미국에선 해고조차 고용주가 직접 하지 않고 외주업체를 시켜서 한다는 걸 알고는 분노에 활활 휩싸였다. 효율과 통계를 신봉하며 똑똑한 척 하던 신입 부사수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이라는 걸 알고 울 때, 그 심정에 절절하게 공감도 했다. 그리고 내내 떠돌아다니던 그가 드디어 소울메이트를 만나 안착하는구나 싶을 때 뒷통수 맞는 결말을 보면서 마치 내 뒤통수가 후려갈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 보고 극장을 나오는데 진짜 뒷통수가 얼얼하고, 스산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토록 위기의식을 심어준 영화가 있었던가?
인생 혼자 가는 것이며, 결혼 안해도 난 잘 살고 있다고 정신승리했던 나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 영화였다. (그러나 지금도 혼자...ㅎㅎㅎ) 그런데도, 혹은 그래서 좋았다.

조지 클루니야 워낙에 좋아했지만, 베라 파미가는 하정우와 함께 찍었던 <두번째 사랑>에서 보고 기억에 남았는데, 이 영화에서 다른 건 몰라도 그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살아 있어서 알아볼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 배우는 푸른 눈동자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해도 알아보게 되었다. 안나 켄드릭은 이 영화에서 까만 머리로 나와서 이후 금발로 나올 때는 못 알아보기도 했는데, 차곡차곡 프로필을 쌓으며 작은 체구에 노래도 잘해서 좋아하게 되었다.


파수꾼 (2011)
윤성현 감독 | 이제훈, 박정민, 서준영 출연

시나리오 쓰는 후배가 자신이 본 올해 최고의 영화였다고 추천해서 무려 DVD를 빌려서 국회도서관에서 봤다. 보다가 눈물이 터져서 상당히 곤란했다. 그냥 운 게 아니라 거의 꺽꺽 흐느껴 우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당시의 나를 기태에 대입해서 봤던 것 같다.
고등학생 친구들 3인방의 이야기가 서걱서걱하게 펼쳐지는데, 서로가 서로와 놀아주면서 한쪽은 이런 너희랑 내가 놀아준다는 느낌, 또 한쪽은 그렇게 멋대로인 너를 우리가 참아준다는 느낌. 그런 것들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셋 중에 기태파 였기에, 설마 이제까지 나와 놀아준 친구들이 나를 참아주고 있었던 건가 싶어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서 기태가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물었을 때 "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 그냥 너만 없었으면 돼."하는 대답에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 그때 이제훈의 섬세한 얼굴에 파르르 비치는 어떤 감정들은 상처받은 청춘이란 바로 저런 것이다 싶을만큼 절묘했다. 실은 그 대사를 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나는 박정민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연기를 잘한 거겠지만...하여튼 지금도 극복 불가) 물론 그도 그런 결말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ㅠ.ㅠ 지금 생각해도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남자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란 대개 폭력으로 얼룩져 있어 잘 보지 않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 이런 섬세한 이야기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메시지는 <우아한 거짓말>과 비슷하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만듦새는 <한공주>와 비슷하다.



건축학 개론 (2012)
이용주 감독 | 이제훈, 배수지, 엄태웅, 한가인 출연

지금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첫 사랑에 대한 남자쪽의 입장을 보여준 영화였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볼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과거의 추억에 잠겨 흐뭇하고 아릿하게 봤다. 1990년대가 낭만적인 과거로 포장되어 드라마화된 거의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만큼 많은 관객이 들었고, 90년대 젊은이였던 이들이 큰 소비자층이라는 걸 콘텐츠 제작자들이 깨닫게 되었다. 이후 <응답하라>시리즈를 비롯해 90년대 복고풍의 이야기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나도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으로써,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풋풋하고 어리숙했던 그 시절은 그 시절대로 낭만적이었고, 세파에 찌들어 40대가 되어 만났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굳이 현실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낸 엔딩도 마음에 들었다. 역시 어른의 사랑이란 저런 것이지, 하며 봤다. 
마지막 폴딩도어(이 영화 이후 인테리어 업계의 폴딩도어 바람을 생각해보면...ㅎㅎㅎ)를 열고 CDP에 이어폰을 꽂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연과 그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울려퍼지던 '기억의 습작'은 잊을 수 없는 엔딩이었다. 충만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오면서 이 얼마만에 극장에서 흡족하게 보고 나온 로맨스인가 반가웠다. 
영화 보고 나와서 한동안 전람회의 음악을 듣고 다닌 것은 물론, 감독님이 낸 책도 샀고, 제주도에 가서 서연의 집에 찾아가 커피도 마셨다.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런 로맨스가 일이년에 한번씩만 나왔으면 좋겠는데...생각해보니 이 다음 세대(일명 가로폰 세대)의 로맨스가 <너의 결혼식>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벤 스틸러 감독 | 벤 스틸러 출연

'라이프' 잡지사의 사진 자료실에서 일하는 월터는 현실이 답답해 맨날 영화 같은 공상을 하는 남자인데, 어느 날 표지용 네거티브 필름이 없어져 그걸 찾기 위해 아이슬랜드까지 여행을 하게 된다. 엉뚱하게도 사진은 지갑 안에 있었지만, '라이프'는 그 사진의 표지로 마지막호를 장식하고 문을 닫는다.

엄마와 누나가 지겨운 레몬 케잌을 가지고 오는 씬부터 나는 이 영화에 업혔다. 현실의 무게를 지고, 직장생활을 16년 동안 하고 있는 남자. 용기가 없어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지만, 상상 속에선 항상 자신이 주인공인 남자. 월터의 가족들을 저주하던 나는 마지막에 결국 가족이 해답이며, 이 가족들도 아무 생각없이 월터에게 기생하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해온 노동자들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는데, 잡지사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더욱 뼈저리게(혹은 환상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라이프지의 모토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를 한동안 외우고 다니기도 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라이프지의 마지막 표지를 보고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다 좋았는데, 실제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는 그런 표지 사진도 아니었고, 실제 라이프의 모토가 그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를 알고 나서 김이 샜다.
하여튼 이후 나는 벤 스틸러가 감독한 영화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다녔는데, 가끔 말도 안되는 괴짜 작품도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키와 코미디로 굳어진 이미지라는 핸디캡을, 자신이 직접 제작, 감독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부수어 나간다는 면에서 프리랜서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위아영 (2014)
노아 바움벡 감독 | 벤 스틸러, 나오미 왓츠, 아담 드라이버, 아만다 사이프리드 출연

연달아 벤 스틸러의 영화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후 믿고 보게 된 벤 스틸러가 나온다고 해서 해외여행 가는 기내에서 봤던 작품이다. 기내라는 열악한 상황(작은 화면, 천둥같은 비행기 엔진소리, 뻑하면 끊기는 화면 등등)에서도 재밌게 봤다. 
다큐를 10년째 찍으며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지식인 조쉬와 프로듀서 코넬리아 커플은 어느 날 수업에 들어왔던 20대의 제이미와 다비 커플과 친해진다. 그들은 유쾌하고, 20대의 문화에 자신들을 격의없이 초대해줘서 급격히 가까워지는데, 제이미가 조쉬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작품을 찍고, 그 작품이 일약 유명해져서 데뷔하여 스타덤에 오르자 자기들이 이용당한 게 아닌가 싶어진다. 조쉬는 파티장에서 제이미에게 주먹다짐까지 하며 개망신을 당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가 말한 진정성은 대중에게는 먹히지 않고, 제이미가 했던 '기만'은 사실은 '젊음'의 특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홍대앞에 사는 40대 커플과 20대 커플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작품인데, 당연히 40대에 속하는 나는 영화 보는 내내 웃으면서도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 작은 벤 스틸러가 키 큰 아담 드라이버 따라서 모자 쓰고, 손 놓고 자전거 타다가 부상당해 실려가거나 나오미 왓츠가 젊은 사람들 춤(힙합)을 어색하게 따라할 때 웃프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인 디 에어>와 비슷한 의미로 나를 돌아보게 만든 작품이다. 지금도 사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데, 모르겠다, 정신차리고 그들처럼 입양아를 데리러 가는 게 맞는지는. 
어쨌든 이런 시나리오는 내가 쓸 수 있었던 건데, 그게 소재라는 생각도 못하고 흘려보낸 미련함에 가슴을 쳤다. 하긴 내가 쓴다고 이 정도로 재밌게 나올리도 없겠지만. 이후 노아 바움벡의 영화는 믿고 보게 되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켄 로치 감독 | 데이브 존스, 헤일리 스콰이어 출연

켄 로치가 좋은 영화를 만들지만,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런 이유로 개봉한 지 한참 지나서 봤다. 막상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부쩍 늙어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 이 할아버지의 고난은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공공기관에 접속만 하면 엑티브엑스를 수십개 깔아야 하고, 그렇게 깔아놓아도 원하는 걸 할 수 없는 홈페이지들. 사람이 아니라 인명수로 계산하고, 강압적인 공권력. 당연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구차하게 구걸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그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것 같았다. 또 이야기의 한축으로 등장하는 싱글맘의 고난과 배고픔은 말해 무어하리. 토마토 수프캔 장면에서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팍 터져나왔다. 인간의 기본은 그런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몸부림은 애처로웠다.

글쓰는 프리랜서로서의 나는 안정적인 일거리를 받기 위해 관과 친해져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있는데, 까다로운 서식과 나열된 첨부문서들, 어려운 공문서 규정들 사이에서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질리는 기분이다. 다니엘 아저씨가 홈페이지를 열고 수정하고 복구하다가 결국 썅 소리를 하는 바로 그 심정이다. 아마도 점점 세상은 더 각박해질테고, 도움을 받고 싶으면 알아서 공부하고 준비해오라는 태도는 당연한 것이 될테고, 그 안에서 나는 소외될테니, 점점 이런 영화들을 공감하며 보게 되겠지. 어쩌면 그것이 80대에 다다른 켄 로치 감독이 아직도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테고.
(어쩐지 그래서 평생학습이 필요한 거라고 외치는 누구누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라라랜드 (2016)
데미언 셰젤 감독 | 라이언 고슬링, 엠마 스톤 출연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모든 영혼에 바치는 헌사.
나는 이 영화의 오프닝에 시쳇말로 뻑이 갔다.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LA(헐리우드). LA로 가는 고속도로가 꿈꾸는 자들의 자동차로 꽉꽉 막혀 있다. 그러자 지망생들이 내려 노래를 하고 군무를 추기 시작한다. 그 부분에서 완전 영혼 탈출을 당해버려 이후 주인공 세바스찬과 미아의 러브스토리에는 그렇게까지 영혼을 실어 응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원래 있던 뮤지컬을 각색한 영화가 아니라 오리지널 뮤지컬인데, 음악도 노래도 좋고, 재미있었다. 영화 보고 나와서 한동안 OST를 듣고 다녔고, 포스터의 색감이 멋져서 따라 그리기도 했었다. 이 영화는 틀림없이 무대공연으로 거듭날텐데,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도 보고 싶다. 

다만 한가지, 어쨌거나 세바스찬은 밴드를 만들어 성공해서 유명세를 치르다가 자신의 재즈바를 오픈했고, 미아는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섰다. 영화를 볼 당시 나는? 여전히 15년째 지망생이고, 앞도 안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성공한 그들의 파탄난 로맨스보다는 초기의 지망생 시절의 고통과 번민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은 재능있는 연인들이잖아? 나는?" 이런 질문을 하며 영화 보고 나와서 술을 마셨다.
라이언 고슬링은 그때도 지금도 별로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엠마 스톤은 한번도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가 여기서 너무 잘해서 아름다웠다.


보헤미안 랩소디 (2018)
브라이언 싱어 감독 | 라미 멜렉 출연

퀸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퀸의 노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극장 들어가서 보고 있는데, 나 왜 이 노래들 다 아는 것이냐? 라디오에서, TV CF에서, 영화에서 귀동냥으로 흘려들었던 그 노래들이 다 퀸의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서야 퀸이 정말 어마어마한 밴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교회 청년부 시절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가 엄마를 죽이고 난 뒤의 고백이라는 거, 리더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라서 퀸이 사탄의 밴드라는 식으로 배웠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원래도 락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런데 그 모든 편견과 취향은 이 영화 하나로 산산이 부서졌다. 프레디 현신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했던 라미 멜렉은 동성애자의 고난과 좌절, 아픔을 너무도 잘 전달해줬다. 프레디가 메리와 조명을 켰다 껐다 하면서 창으로 쳐다보는 장면은 말 한마디 없는데도 정말 가슴 아팠다. 프레디의 일대기이면서 다른 멤버들도 서운하지 않게 잘 다뤄준 것도 좋았다. 그들이 음악을 만드는 씬씬, 에너지와 열정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오감 전체가 떨리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영화 보고 나와서 유투브로, CD로 퀸의 노래만 한달 정도 미친듯이 반복해 들었다.

그러나..그러나 말이죠. 프레디 머큐리 역시 완성형 천재 아닙니까? 그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나 정체성으로는 고민이 많았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이다. 주변에서도 한눈에 다들 알아봤다. 부럽따흑흑흑. 이 영화의 유일한 부작용이라면 역시 예술은 천재의 장르인가 하는 좌절감을 안긴다는 것.  


아쉽게 탈락한 영화
나의 영화 베스트 10 (1995~2008)을 이제 보면 왜 <극장전> 같은 엉뚱한 게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텐데, 세월이 지나 지금 돌아보면 <극장전> 대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맘마미아> 같은 게 들어갔어야 했다고 본다. 
지금의 이 리스트도 10년 뒤에 보면 고쳤어야 했다고 느끼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넣어보는 아차상 리스트. 

<그래비티> _ <언 애듀케이션> 대신 이 영화를 넣을까 수만번 고민했다. 그만큼 좋은 영화. 절대고독에 대해 실감하게 되었고, 마지막 지구에 불시착해 걸어나오는 장면은 태아가 일어나 걷기까지, 혹은 원시 인류가 현생 인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멋진 씬이었다. 불록 언니, 나이 들어서도 멋져요!
<부당거래> _ 만듦새로는 최고의 한국영화 아닐까 싶다. 마지막이 비극적이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엔딩도 좋았다. 이후 비슷한 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는데, <부당거래>를 능가하는 영화는 없었다.
<스파이 브릿지> _ 멋진 남자 두 명이 나오는 영화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이 자유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을 대표한다고 하면 더욱. 다 보고 나서 감독이 스필버그라는 걸 알고 놀랐다. 이분 SF만 만드는 분이 아니었어.
<500일의 썸머> _ 로맨스를 이 정도로만 만들 수 있다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자명한 이치를 이토록 설레게, 세련되게 만들 수 있다니!

번외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과 <더 그레이>는 영화 만듦새로는 범작이거나 그보다 못한데, 당시 내 상황에 절묘하게 파고 들어와 인생 영화가 된 작품들. 재능이 없는데도 꾸준히 노력하면 예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암담한 대답이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에 들어있어, 보고 나서 매우 우울했다. 그 여사님의 해맑음이 깨지지 않기를 기원했는데...흑흑. 리암 니슨이 나온 <더 그레이>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빙판에 살아남은 남자가 마지막에 늑대떼들과 맞서서 "자 덤벼봐!"하는 영화인데, 굴하지 않는 투지가 마음에 들었다. 당시 내게 무척 필요했던 투지였다. 리암 니슨의 푸른 눈이 진짜 멋졌다.

(헥헥, 이거 쓰는데 무려 4시간 걸렸다. 10년 뒤의 내가 칭찬해주겠지.)

덧글

  • 우물쭈물하지않으리 2020/03/11 14:56 # 답글

    재밋게 잘봤어요 ㅎㅎㅎ저도 다 좋아하는 영화네요 근데 파수꾼 저 대사는 박정민이 아니라 마지막에 그 둘 아닌 동윤이가 했던 대사인듯 하네요 ㅎㅎㅎ 며칠전에 갑자기 생각나서 파수꾼 다시 봤거든요
  • 이요 2020/03/11 14:59 #

    정말요? 난 왜 박정민이 했다고....아, 맞다. 제일 믿었던 친구가 마지막에 한 말이라...그런데 왜 나는 계속 박정민을 싫어하고 있는가...ㅠ.ㅠ
  • 우람이 2020/03/11 15:05 # 답글

    오늘의 저는 박수를 칩니다! 안 본 영화가 많아서 좋은 가이드가 될 것 같아요.
  • 진이 2020/03/11 19:06 # 삭제 답글

    파수꾼 봐야겠다
  • 해리 2020/03/12 10:55 # 삭제 답글

    잘 봤습니다. 아무래도 올해는 클린트이스트우드 님을 봐야겠네요.(단 한번도 감독한 작품을 본적이 없다요.ㅠㅠ)
    20위까지도 부탁드립..장르를 나눠서 또 해달라 하면 쌍따귀 세례..
  • 이요 2020/03/12 11:10 #

    닥치세욧!! ㅋㅋㅋ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작을 하나도 못봤다니, 부럽습니다. 당신은 이제 감동만 하면 됨!ㅎㅎㅎ
  • 앤님 2020/03/12 18:31 # 삭제 답글

    외장하드에 몇년째 넣어만 두고 안보고 있는 영화가 탑텐중에 절반이나 있네요 ㅋㅋㅋ 언제 볼지..
    그래비티 들어갔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혼자 극장에서 주룩주룩 따흐흑 하면서 본건대 왜그랫을까-.-ㅋㅋ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건 지구에 착륙해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던 블락 언니의 탄탄한 허벅지네요 ㅋㅋㅋ 운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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