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 읽고

괜찮은 사람
강화길 | 문학동네 

올해의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인데 다들 좋다고 해서 도서관 간 김에 빌려 왔다. 말도 안되는 SF소설을 읽다가 이 소설을 읽으니 문장도 단정하고, 단 몇줄 만에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았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완전 기 빨리는 소설이다.
누군가가 <82년생 김지영>을 스릴러로 쓰면 강화길의 세계가 아닐까 하던데 적절한 표현이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예민하고 트라우마가 있으며 그 덕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속을 털어놓지 못하니 안좋은 상황에 질질 끌려들어간다. 이 작가는 가스라이팅에 대해서도 굉장히 잘 알고 있다. '괜찮은 사람'으로 불리는 교묘한 통제광들의 행동을 어찌나 예리하게 잘 보여주는지!  
뒤에 황현경이라는 평론가의 비평이 붙어있는데, 드물게 공감하며 읽었다. '보면 강화길의 인물들은 한번 씩 꼭 이런다'로 시작하는데, 거기서부터 얹혔다. ㅋㅋㅋ

첫작품 호수와 표제작 괜찮은 사람은 비슷한 이야기다. '호수'는 새벽에 호숫가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된 여자의 친구와 애인이 그 호숫가에 현장검증하러 가는 이야기인데, 웬만한 스릴러 영화 뺨칠 정도로 긴장감이 크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민영은 친구가 남친에게 맞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다문다. 근데 남친은 민영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다. '괜찮은 사람'의 화자는 미국에서 온 변호사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 남친이 싸이코패스 같다. 경치좋은데 사놓은 집을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가는 여정이 펼쳐지는데 역시나 답답하고 숨막히고 미칠 것 같다. 아이스크림 파는 남자에 대한 묘사는 정말...으으으
암에 걸려 아픈 딸이 엄마의 문화센터 가곡반 발표회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이야기 당신을 닮은 노래에서는 내내 애달파 보였던 엄마가 끝까지 강사 질리게 하는 걸 보고 역시나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고 느꼈고, 인도의 커플과 한국의 커플을 교차로 보여주는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에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커플이 허세부리느라 길을 잃고, 수백개의 계단을 올라 어느 동네 꼭대기에 이르러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는 서울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야, 우리 진짜 대박 촌스럽다"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도시 폭발 이후 그곳에 들어가 돈을 벌려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 에서는 미드 <체르노빌>의 향기가, 터무니 없이 싼 가격의 단독주택에 동거하게 된 세 여자 이야기 벌레들에서는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향기가 났다. 방을 제공하는 여자와 룸메이트 여자들 사시의 미묘한 시소게임 혹은 삼각관계가 정말 잘 그려져 있다. 가난해서 공부를 못했던 엄마가 자기 아들만은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어 지역 명문유치원에 보내려는 니꼴라 유치원도 재밌었다. 모든 소설이 흥미로운 구성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소설도 시원한 결론은 내려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뭐야? 이렇게 끝나?" 짜증내다가 나중에는 체념하게 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독서모임에서 했을 때 후배는 장류진의 소설이 여느 한국소설들처럼서울 찜찜하지 않고 산뜻하게 끝나서 좋다고 했다. 나도 공감한다. 찜찜한 여느 한국 소설의 전형이 바로 강화길의 소설 아닐까? 김영하는 단편소설이란 차를 타고 지나다가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신호등이 바뀌면 차는 떠나고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어진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강화길의소설은 너무나 단편소설이다. 또한 틀림없이 페미니즘 소설인데, 화자들이 비호감이라는 점에서 여느 계몽적인 페미니즘에서 한발 더 나가 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비호감인 화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마음이 불편하니까. 사실 순결한 피해자란 머릿속의 관념이지 실제로는 없다. 사람은 다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게다가 상처있는 여성이란 더더욱 그렇다.
한 편만 읽었더라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상찬했을 지도 모르는데, 여러편을 읽다보니 이 작가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날벌레들, 확 밀거나 잡는 행동, 껌껌해서 보이지 않는 복도끝, 호더처럼 쌓아놓은 물건들 등이 여러 작품에 겹치게 나와서 비슷비슷해 보인다. 한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읽으면 이게 단점이다. 

밑줄긋기
75 _ 잘 하지도 못할 거라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225 _ 그들은 적응하려고 노력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허세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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