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읽고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 자음과모음

이 단편소설집에는 우리시대의 PC함을 주제로 쓴다면 이런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소설들로 가득 차 있다.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채우고 있는 주제들이 형상화된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의사라고 한다. 보통 의사가 글을 쓴다고 하면, 자신이 병원에서 경험했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쓰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별 생각이 없다. 내가 좋아했던 박경철 작가부터 요즘의 남궁인이라든가 수많은 의사 작가들이 그래왔다. 그런데 이 소설집의 첫 작품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에서 이 작가는 묻는다. 그래도 되냐고. 그래도 아무 문제 없냐고. 환자의 이야기를 끌어와 블로그에서 자신의 주장을 하는 여의사와 그녀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소설을 썼던 화자를 대비시키며 남의 인생으로 글을 쓰는 자의 윤리에 대해 묻는다. 이 짧은 소설 안에 동성애, 생활동반자법, 글쓰기의 윤리, 파탄난 가족 등 온갖 문제들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표제작이자 두번째 소설인 '다른 세계에서도'는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는 별로였다. 남성 작가가 여성이 되어 이야기하는 설익은 부분도 있고, 내가 겪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언니와 임신해서 결혼하는 동생이 뭘 그렇게 갈등하겠는가 싶기도 하고.
'라이파이'는 치매가 온 아버지 이야기인데 몽골 패키지 여행과 장사장 캐릭터가 펄펄 살아 있었고, '부태복'은 탈북자 의사의 이야기인데 코로나와 연결이 되어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 읽었다. 이거야말로 의사 작가가 쓸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어쩐지 자꾸만 부태복에게 엎히는 내 마음..^^ '컨프론테이션'에서 이 작가는 다시 한번 여성 화자에 도전하는데, '다른 세계에서도' 보다는 성공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이 문제로 골치를 썩히고 있어, 꽤나 감정이입하며 읽었다. 자기를 위해 면접에서 빠져주겠다는 남친에게 빡치는 여자 마음도 너무나 잘 알겠고, 그래서 개지랄 떠는 여친에게 "넌 나를 왜 만나니?"하는 남친도 이해가 간다. 마지막 줄 '한서라고 달랐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흑흑. 저 100% 동감한 두 줄입니다. 마무리가 넘나 좋았고요..하아....정말 답이 없는 이야깁니다. 진짜. ㅠ.ㅠ 이 작품에는 미술가들과 미술관들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그것도 좋았다. 아마 그래서 더 감정이입했을테지. '눈빛이 없어'는 산재사고와 그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전형적으로 쓰이지 않아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제철소 취재하면서 나는 산재사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며칠 전에도 수영 못하는 실습생을 잠수 시켜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남자들은 군가산점 폐지 같은 것에 화를 낼 게 아니라 이런 거에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항상 생각해왔다. '너를 따라가면'은 5.18 광주에 있었던 간호사 이야기다. 읽는 내내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고민시 얼굴이 떠올랐고, 마지막에는 훌쩍훌쩍 울면서 읽었다. 흑...그 피...ㅠ.ㅠ '참'은 아동강간범에 대한 혐오와 교도소내 인권이 충돌하는 지점을 잡아낸 작품인데, 대학교의 교수 라인 타는 부분을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좀 안타까웠다. 그 부분만 제대로 알았어도 더 재밌게 읽었을텐데...

이렇게 리뷰를 정리하고 보니 표제작 빼고는 다 좋았네. 다만 뭐랄까...마지막에 각 소설이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어떤 부분을 차용했다는 걸 그렇게 소상히 밝혀야만 했나 싶다. 글 쓰는 자의 윤리가 강박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워낙 표절 문제들이 첨예하다보니 소설가들이 너무 겁을 낸다. 리영희의 말처럼 지식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의견이 내 안에서 곤죽이 되어 나오는 현상인데....이렇게 하나하나 다 따져 쓸 필요가 있는 건지...


밑줄긋기
13 _ 마치 날카로운 절단면이 모두 마모된 해변의 유리알처럼, 둥글게 빛났으나 더는 깨지지 않기로 작정한 듯 단단한 느낌이었고 스물여섯이라는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 단단함은 시린 구석마저 있었다.
15 _ '애증'은 함정과도 같아서 관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애초부터 필요 없던 감정임을 알게 된다.
105 _ 진단은 귀납적 추론이다. 개별 증상을 통해 가능성 낮은 질병부터 소거하여 단시간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편견을 수반하며, 축적된 임상 경험으로 구분과 배제에 능할수록 유능한 의사가 된다.
154 _ 경로가 정해진 삶을 살게 되면 그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실패가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게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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